독일라이프 24화. Köln, 20. März 2025
생일을 맞아 혼자 떠났다. 꼭 가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 도시 쾰른으로. 마침 나의 생일 주간에 기차 티켓이 말도 안되게 저렴해 예매해둔 터였다. 운이 좋게 일주일 내내 날씨도 화창했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쾰른 중앙역으로 향하는 기차 안, 한국에 있는 베스트프렌드 두명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서울과 부산에서 케이크를 준비해 초에 불을 붙인 그녀들. 친구들의 생일축하 노래가 끝나고 아이폰 화면 너머로 초를 '호~'하고 불었다. 처참한 네트워크 연결 상태에 금방 끊어야 했으나 마음을 데우기는 충분했다.
나흘 동안 지낼 숙소는 쾰른 중심지에서 2시간가량 더 가야 했다. 명소를 구경하려고 떠난 여행이 아니었기에 일부러 외곽에 있는 한적한 곳으로 예약했다. 내가 묵을 방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했다. 드넓은 단독주택의 다락방이었는데 이보다 안락할 수는 없었다.
집주인 독일인 중년 부부의 취향이 묻어나는 인테리어, 다락방 특유의 아늑한 분위기, 속이 뻥 뚫릴 만큼 커다란 통창. 창문을 열면 평화로운 전원 풍경과 청아한 새소리가 온감각을 어루만졌다. 잘 정돈된 침구와 몸을 담글 수 있는 욕조 그리고 향긋한 차와 커피로 가득 채워진 미니바까지. 베를린 아파트에서 줄곧 시달렸던 불면증은 마법처럼 사라졌다.
어딜 한번 가려면 오랜 시간 걷고 버스를 타야 하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에어비앤비 평점 4.99 슈퍼호스트 숙소다웠다. 어스름이 내려앉으면 꿈같은 노을이 젖어들었다가 어느새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이런 곳에 살면 스트레스의 99퍼센트는 저절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굳어있던 몸과 정신이 고요하지만 충만하게 차올랐다.
생일 당일에는 나의 독립출판사 이름처럼 진정한 '사치'를 누렸다. 장담컨대 외지인이라면 아무도 시간과 돈을 들여 오지 않을, 더군다나 나 같은 외국인 여행객이라면 평생 있는 줄조차 모를 어느 장소를 찾아갔다. 산이라고 해야 할지 숲이라고 해야 할지마저 애매한 곳. 다른 사람들이 추천하거나 꼭 가봐야 한다는 명소 대신,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내가 택한 곳.
한참을 거닐며 스스로를 '사유하고 치유했다'. 바스락 바스락. 탐험가와 철학자의 영혼을 품고서 마치 세상과 나 단둘만 아는 짜릿한 고독을 음미했다. 그날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둔 기록이다.
나무의 기운을 강하게 타고난 아이는
아무도 밟지 않았을 것만 같은 숲을
아름답지도 않은, 그리하여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법한 어느 끝자락에서
오롯이 사유하고 온전히 치유했다
잔가지와 낙엽과 풀무덤과 비밀들
거의 다 오르니 광활한 풀밭이 펼쳐졌다. 저 멀리 능선을 따라 멋진 저택들이 지어져 있었다.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 살고 있었다니. 때마침 은은한 아우라를 풍기는 백발의 여성이 걸어 내려왔다. 산책을 나오신 모양이었다.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한동안 저택들을 바라봤다. 저런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인생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러다 새삼 깨달았다.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내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지금까지는 한없이 그 길들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이젠 뒤돌아보지 말고 이런 내 인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나에게 주는 생일선물이었다.
나의 생일은 춘분 무렵이다. 올해는 딱 춘분과 겹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 이때를 기점으로 낮이 밤보다 길다. 세계 행복의 날이기도 하다. 수풀길 위로 햇빛에 비친 내 그림자가 선명했다. 빛나는 행복이 있기에 어두운 그림자도 있는 법이지. 아까 그 여자와 나는 정반대 지점에서 또 한번 마주쳤다. 스쳐지나가는 순간 느꼈다. 마침내 엉킨 실타래가 풀렸구나.
숙소에 도착했더니 방문 앞에 생일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Happy Birthday wünschen Maggy & Christian' 집주인 부부가 구워준 케이크였다. 전날밤 체크인할 때 혼자 조용히 생일을 기념하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더니 이렇게 배려 넘치는 축하를 해준 거다. 처음엔 공간 자체에 감탄했고, 결국엔 따뜻한 존중에 감동했다.
케이크를 먹으며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온 생일 축하 메시지를 하나씩 읽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사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사랑. 그날 저녁 끄적인 단상으로 이 글을 마친다.
해마다 축하해주는 사람들이 바뀌는
서른세번의 생일을 보내며 깨달은 점은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그리고
당신들이 어떤 상황을 지나가고 있든
매해 나의 존재를 축하해준다는 것
무수한 시절인연 속에서 이번 생은
나와 평생 함께 가길 선택한 사람들
이렇게 또 과분한 사랑을 받고
태어남을 귀히 여기게 됩니다
온마음 다해 보낸 선물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봄밤에
고맙습니다
2025년 3월 20일 쾰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