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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달력과 엉덩이

재래식 변소에서 신문지를 비비며

by 다올 Jan 13. 2025

    

 요 몇 년간 나는 달력을 잘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낭패를 볼 때가 종종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요한 날을 달력에 표시를 해놓기는 했지만, 달력을 안보다 보니 하나 마나였다. 요즘엔 아예 표시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엔 연말이 되면 장지갑 크기의 수첩을 사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수첩을 사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소임을 다해가는 수첩에서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친구의 생일을 옮겨 적는 일이었다. 이름 옆엔 하트가 그려지기도 하고 클로버 등 몇 가지의 이모티콘으로 표시했다.

 중·고등 시절엔 자신만의 표시로 비밀스러운 그날을 기록하기도 했다. 어쩌나 남학생이 이게 무슨 표시냐고 물으면 얼굴이 괜히 빨개져서 얼버무리며 수첩을 뺏기도 했었다. 결혼 뒤엔 남편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그리고 시부님의 생신과 시댁 식구들의 생일 그리고 제삿날이 추가되었다. 그 뒤로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표시해야 할 생일이 늘었다.   

 

 이젠 달력에 표시했던 기념일들을 핸드폰에 입력한다. 한 번 표시한 기념일들은 해마다 잊지 않고 같은 날에 자동으로 표시된다. 그러다 보니 기념일을 기억하는 건 내 기억이 아니라 구글 달력이다. 안 그래도 ‘나 치매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깜빡깜빡하는 중인데 해마다 옮겨 적지도 않으니 가까운 이들의 생일을 잊고 지나가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그나마 카톡에서 표시된 것을 보거나 기념일을 알리는 알람 소리를 듣게 되면 확인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여러 번 있다. 간혹 음력과 양력이 제대로 입력이 안 돼 엉뚱한 날에 생일을 축하하기도 한다.  작년에 큰 시누이가 자기 생일을 축하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며 생일 다음 날 전화가 왔었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올핸 꼭 잘 기억해야지 했는데, 또 하루 지나서 축하 선물과 메시지를 카카오톡으로 보냈다.     


 내가 국민학생이었을 때는 달력이 귀했다. 그래서 달력은 귀한 선물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연말이면 둘둘 말린 채 우윳빛 비닐 포장 안에 들어있는 달력을 두세 개 챙겨 오셨다. 한 개는 꼭 시골에 갖다주었다. 그 달력은 작은아버지 방에 걸렸다.      

 할머니 방 벽엔 한 장 짜리 달력이 1년 내내 붙어있었다. 양복에 이 대 팔 가르마를 한 국회의원이 사진이 가운데 크게 그려있고 그 주위를 빙 둘러 열두 달이 표기돼 있다. 달력이라기보다는 국회의원 홍보용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겠다. 1월엔 깔끔했던 국회의원의 얼굴은 사촌들이 외눈 가리개를 그려 넣고, 볼에 흉터 자국을 그려 넣어 애꾸눈 선장처럼 만들었다. 때로는 환하게 웃고 있는 입 사이의 하얀 이에 검정 사인펜을 칠해 영구로 만들기도 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시골 할머니 댁 변소는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재래식이었다. 국민학교 다닐 때까지는 변소 한쪽에 신문지를 잘라놓고 휴지 대용으로 사용했다. 큰일을 보려면 널빤지에 앉아서 일을 보는 내내 신문지를 문질러 부드럽게 해야 했다. 얼마나 열심히 비볐냐에 따라 나의 엉덩이에 느껴지는 감촉이 달랐다.     



 그때 가장 고급 휴지는 일력(日曆)이다. 당해 연도가 쓰여있는 앞장까지 딱 366장으로 된 일력. 습자지로 된 일력은 누구나 탐내는 달력이다. 매일 태엽을 감아야 돌아가는 괘종시계처럼 매일 한 장씩 뜯어내야 하는 일력은 자칫 게으름을 피우다간 날짜를 잘못 볼 수도 있다. A4보다 조금 터 큰 일력은 평일은 검정, 반공일인 토요일은 파랑, 일요일엔 빨간색으로 날짜가 표시되어 있다. (나는 어릴 적에 반공일의 뜻을 내 맘대로 해석했다. 그 시절엔 학교 담벼락에 반공, 멸공, 간첩 신고는 113이라는 글이 빨간 페인트로 쓰여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토요일이 반공정신을 되새기는 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일력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요즘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변기에 앉아서 볼일을 다 본 뒤엔 따뜻한 물이 세정해주고 기분 좋은 바람이 엉덩이를 말려주는 시대이지 않은가. 세월이 변하면서 모양도 쓰임도 달라지는 것들이 많다. 그때는 불편했던 것들이 가끔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향기롭지 않은 것들도 추억이 되는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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