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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 항동 철길의 추억

어릴적 놀이터였던 철길의 추억

by 다올


주막거리에 있는 사택에서 오류국민학교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였다. 경인로를 따라서 학교를 갔다. 학교 가는 길중간에 살짝 옆길로 새면 철도길이 있다. 지금은 화물선이 다니지 않고 철도만 남아있다.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그 철길은 불편하지만 핫플레이스로 알려져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철도를 따라가다 보면 항동이 나오는데 항동엔 수목원이 조성되어 있고 근처에 맛집이 많다고 한다. 서울을 떠난 지 삼십 년이 되었고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 길을 걸은 기억이 없지만 기억 속 철길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 길을 걸어 다니던 시절에도 화물선은 자주 다니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가 학교를 오가는 시간에는 거의 기차를 볼 수 없었다. 끝없이 이어진 두개의 선로를 따라 우리는 양 팔을 벌리고 뒤뚱뒤뚱 균형을 잡으며 선로위를 걸었다. 가끔은 누가 왜 걷는지 내기도 했다. 운동신경이 있던 나는 제법 균형을 잘 잡아서 내기에 거의 이겼다.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동전을 선로위에 얹어놓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그 길을 걷는 내내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선로의 사이에 놓인 나무 침목도 훌륭한 놀이감이다. 침목을 깡총깡총 뛰어 건너며 놀았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정해진 숫자만큼 앞으로 가는 놀이도 했다. 주먹은 한 단, 가위는 두 단, 보는 다섯 단을 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을 장남감 삼고 놀이터로 활용했던 것 같다. 공기 돌을 모아서 놀기도 했고 공책 겉장을 찢어 뚝딱 딱지를 접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아카시아 잎을 떼며 딱 밤 맞기를 했다. 남자애들은 긴 막대기 하나만 있어도 칼싸움놀이를 신나게 했다. 우리는 주머니에 동전 몇 개만 있어도 행복했다.


이른 봄이 되면 오류동에서 항동으로 이어지는 철길을 따라 우리 식구들은 나물을 캐러 다녔다. 선로는 약간 둔덕위에 있어서 바닥과 단차가 있었다. 살짝 비탈진 그 곳에 쑥이며 냉이가 많았다. 엄마는 우리 삼 남매 배에 보자기를 둘러 주머니처럼 만들어 주셨다. 손에는 작은 과도를 쥐고 쑥을 뜯고 냉이를 캤다. 그 때는 토요일에도 학교를 갔던 때였다. 그래서 우리의 봄나물 채집은 주로 일요일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4월정도면 끝이었다. 봄이 가기 전 서너 번 그렇게 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쑥을 뜯을 때도 기차를 피해야 했던 기억은 없다.


철길은 학교를 오가는 길에 즐거운 놀이터였다. 봄이면 가족들과 봄나물을 뜯는 장소였다. 그리고 항동 약수터를 갈 때는 꼭 철길을 따라가야 했다. 일요일 이른 아침에 약수터에 가는 길은 채 마르지 않은 이슬이 풀잎마다 맺혀 있었다. 이때는 잠자리를 잡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잠자리는 시야가 얼마나 넓은 지 조심조심 뒤쪽에서 잡으려 해도 어느새 눈치를 채고 휙 날라간다. 하지만 이른 아침 이슬에 날개가 젖은 잠자리는 빠르게 날개를 펴지 못한다. 세 마리 던 열 마리 던 마음먹은 대로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시간이다.

. 그 시절의 철길은 단순한 길이 아닌, 추억이 깃든 특별한 공간이다. 그 곳에서의 모든 순간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지금도 마음 한 켠에 따뜻한 온기를 전해준다.다음에 서울에 가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동창을 불러내어 함께 뒤뚱뒤뚱 선로를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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