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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7 국민학교 소풍날

한 시간씩 걸어서 소풍가던 날의 추억

by 다올

잠들기 전 몇 번이나 베란다 문을 열고 하늘을 봤다. 내일은 소풍날이다. 학교가 파하고 엄마와 같이 시장엘 갔다. 김밥이 흔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김밥천국이니 김밥나라, 이름이 들어간 김밥을 파는 집이 없었다. 간혹 시장 골목에 아주머니들이 김밥을 쌓아놓고 파시긴 했다. 참기름을 잔뜩 바르고 참깨까지 뿌려진 김밥.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소풍과 관련 된 전설이 있다. 아주 오래전 학교가 생기기 전에 지금의 학교 자리는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교가 공동묘지를 밀고 많이 지었다고 한다.) 어느날 호랑이와 용이 싸움을 했는데 그 싸움은 매우 치열했다고 한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었다. 용과 호랑이는 피를 뚝뚝 흘리며 싸웠고 결과는 용이 졌다고 한다. 운동장 한가운데를 파보면 용의 뼈가 나온다고 했다. 싸움에 진 용이 분한 마음에 소풍날이면 하늘에 용 구름을 만들고 비가 온다는 내용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앞뒤 맥락도 없고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전설을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까지 믿었다. 왜냐하면 소풍 가는 날 하늘엔 용처럼 꾸불꾸불하고 긴 구름이 낀 날이 몇 번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벌써 일어나신 엄마는 김밥을 싸시느라 바쁘다. 내가 일 학년일 때는 내 것만 싸면 되지만 두 동생이 학교에 들어가서는 도시락을 세 개 싸야 했다. 도시락은 네모난 은박지나 얇은 나무 도시락통에 담았다. 소풍 가서 먹는 김밥도 맛있지만, 김밥 쌀 때 먹는 꼬투리가 더 맛있다. 우리 셋은 엄마 옆에 바짝 붙어 김밥 꼬투리를 서로 먹겠다고 한다. 까만 김 위로 튀어나온 당근과 오이, 단무지와 소시지가 도시락에 들어갈 김밥의 속보다 훨씬 많이 들어가 맛이 좋다.

소풍날은 점심뿐 아니라 아침도 김밥이다. 그야말로 횡재다. 소풍날 아니면 김밥을 먹을 날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모든 물자가 흔하지만 70년대 말, 80년대 초는 그렇지 않았다. 그 시절엔 소풍 가방이 있었다. 지금은 학교에 다닐 때 쓰는 가방이 배낭 스타일이어서 따로 소풍 가방이 있지 않지만 내가 국민학생 때는 책가방과 소풍 가방이 따로 있었다. 여자아이들의 소풍 가방은 주로 빨강, 노랑 가방이었고 남자아이들은 감색, 파랑, 초록색의 가방이다.


소풍 전날엔 엄마와 슈퍼에 가서 내가 먹고 싶은 과자와 음료수를 고를 수 있었다. 요즘은 마트에 가면 과자의 종류가 엄청 많다. 그땐 과자의 종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소풍 가방에 단골로 들어가는 과자는 새우깡, 웨하스, 맛동산, 알사탕 등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잘 먹지 못하는 탄산음료도 살 수 있다. 나는 콜라랑 사이다는 너무 코를 탁 쏘아서 싫었다. 그래서 오렌지 맛 환타가 내 최애 탄산음료였다.

작은 소풍 가방엔 도시락과 과자 한 봉지 그리고 환타 한 병과 삶은 달걀이 들어간다. 물을 담음 물통은 따로 어깨에 메고 갔다. 소풍날에 엄마가 꼭 챙겨주시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삶은 밤을 실에 꿰어서 밤 목걸이를 만들어 주셨다. 지금과 달리 우리는 걸어서 소풍을 갔다. 보통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갔다. 걸어가면서 먹을 수 있게 삶을, 밤을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이다.


학생들이 많다 보니 소풍을 두 군데로 나누어 갔다. 홀수 학년과 짝수 학년으로 나누어서 갔다.

몇백 명의 아이들이 소풍 가방과 물병을 메고 도로 옆길 인도를 따라 긴 행렬을 만들며 걸어갔다. 중간마다 선생님과 육성회 엄마들이 우리가 딴짓하지 않게 지도했다.

소풍 장소에 도착하면 가방을 내려놓고 여러 가지 게임을 했다. 둥글게 앉아 수건돌리기를 했다. 돌아가면서 노래도 불렀다. 뭐니 뭐니 해도 소풍의 백미는 보물찾기이다. 선생님들께서 미리 나무나 돌, 풀 속에 숨겨 놓은 쪽지를 찾는 놀이이다. 우리는 눈에 불을 켜고 쪽지를 찾느라 수풀을 헤맨다. 그렇게 샅샅이 찾아도 안 보이는 쪽지를 친구들은 잘도 찾아낸다. 쪽지엔 교환할 수 있는 선물이 적혀있다. 공책이나 연필 뭐 이런 것들이 적혀있다. 나는 보물찾기를 잘못하는 축에 속했다.


보물찾기 시간이 끝나면 점심시간이다.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서 친한 친구들끼리 도시락을 먹었다. 시절이 넉넉한 때가 아니어서 종종 도시락을 못 싸 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엄마는 도시락을 꼭 두 개씩 싸주셨다. 우리 반에는 보육원에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것을 꼭 싸주셨다. 반장 엄마나 육성회 엄마들은 선생님의 도시락을 챙겨 왔다.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간 김밥과 과일. 그리고 음료와 떡 등 금방 선생님들을 위한 한 상이 차려졌다. 종종 선생님께서 도시락을 못 싸 온 친구들을 챙겨주시곤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소풍을 따라간 적이 있는데 그때 엄마들이 선생님 식사를 식당에 맡겨서 박스를 바리바리 들고 산까지 와서 차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진짜 깜짝 놀랐다. 도시락이 소홀하면 나중에 교사들끼리 흉을 본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래서 엄마들이 돈을 꽤 주고 도시락을 맞춰 온다고 했다. 음식 준비야 식당에서 한다지만 그 많은 음식을 엄마들이 다 이고 지고 날라야 했다.

김밥을 두 개씩 입에 넣고 볼이 터지라 먹는 친구도 있다. 그때는 캔을 된 음료수가 없어서 병에든 음료수를 가져갔다. 고학년 아이들이야 자기들이 스스로 음료수를 딸 수 있었지만, 저학년은 일일이 엄마나 선생님께서 따주셨다. 걸어오느라 소풍 가방에서 흔들린 음료수가 때로는 분수처럼 솟구치기도 했다. 그러면 병 안엔 음료수가 반도 남지 않는다. 종종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일부러 병을 흔들어 병을 따서 친구들한테 뿌리기도 했다. 그렇게 요란한 도시락 시간이 끝나면 숲에서 뛰어다니며 놀았다. 잠자리도 잡고 메뚜기, 무당벌레를 잡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걸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 학교로 돌아왔다.

요즘은 소풍도 버스를 전세해서 다닌다. 도시락을 직접 싸기도 하지만 근처 김밥집에서 사서 가기도 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요즘은 김밥을 사서 와서 집집이 다른 김밥 맛을 볼 수 없다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 근처 김밥집은 소풍날이 대목이라고 한다.

소풍날이 아니더라도 종종 김밥을 싸 먹는다. 분홍 소시지 대신 불고기 맛이 나는 햄을 넣고 달걀도 듬뿍 넣고 김밥을 싼다. 깻잎을 두 장 깔고 마요네즈에 버무린 참치김밥. 치즈를 넣은 치즈김밥. 때로는 묵은지를 볶아 넣은 김치김밥까지 종류도 다양하게 싸 먹는다.

내일 점심엔 김밥을 말아야겠다. 냉장고에 있는 채소들을 탈탈 털어서 두툼하게 넣고 김치도 넣고 푸짐하게 말아서 먹어야 겠다. 문득 엄마가 싸주시던 김밥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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