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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5 저 제천까지 타고 가면 안될까요?

버스기사님의 배려

by 다올

대구의 정호승 문학관, 경주의 동인, 목월 문학관과 불국사를 들러 두루두루 돌아보고 다시 버스를 탔다. 버스가 있는 주차장을 못 찾아서 조금 헤맸다. 3시 반까지 모이라고 했는데 십 분 정도 늦었다.


금요일날 집을 나서 면서 문학기행이 끝나고 단양 친정집에 다녀와야겠다 고 생각했다. 대구에서 단양까지는 두시간 반에서 세시간 정도 걸리다. 내가 사는 섬에서 친정집까지는 꼬박 6시간 이상 걸린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대구에 간 길에 친정을 들러 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여행지가 경주였다. 갈까 말까 고민을 했다. 다시 부산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온다.

“어디서 만날까? 나 볼인 다 끝났는데.”

두사람의 시간을 맞춰보니 안동에서 만나면 얼추 비슷한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포항으로 가시는 두 학우와 경주터미널에서 내렸다. 경주에서 포항은 같은 경북이라 그런지 차가 자주 있었다. 나는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터미널에 있는 찻집에 들러 버블 라떼 한잔을 시켰다. 핸드폰을 꺼내 알람을 5시에 맞췄다. 전에 한번 목포에서 광주가는 버스표를 끊어놓고 시간이 남아서 책을 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가 떠나서 못 탄 적이 있다. 시원한 차를 빨대로 쪽쪽 빨아가며 책장을 넘겼다. 펜을 들고 줄도 긋고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들을 적어가며 책을 읽었다. 시간은 금방 흘러 알람 소리가 났다. 컵 아래 남은 버블들을 빨대로 쏙쏙 얼른 빨아 오물오물 씹는다. 미끈거리며 쫄깃쫄깃한 식감이 좋다.


11번 승강잔에서 잠시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안동 행 버스의 종착지는 제천인가 보다. 앞유리에 제천이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동지가 지나 날이 길어졌지만 지방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에는 밤이 빨리 내려왔다. 시내를 벗어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어두워졌다. 안동까지는 한시간 반정도 걸린다. 잠시 눈을 부친다. 익숙한 벨 소리에 살폿 들었던 잠이 깼다. 남편이다. 광주에서 차가 많이 막혀서 이제 담양에서 저녁을 먹고 있다고 했다. 나는 여섯 시 반쯤 도착하는데 그가 오려면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짜증이 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인 것을. 제천에서 만나기로 다시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끊고 제천 행 버스표를 알아보았다. 안동에서 내리면 또다시 한시간 반을 기다려야 차를 탈 수 있었다.


문득 버스를 탈 때 보았던 제천이라는 글이 떠올랐다. 집이 단양이지만 제천 쪽에 가까운 곳이라 친정의 생활권은 제천이다. 기차든 버스 든 제천에서 타고 내린다. 차는 점점 안동을 향해 달리고 있다. 톨게이트를 나오고 터미널에 가까워졌는지 버스의 실내등이 켜진다. 조심스럽게 앞자리로 가서 기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이 차를 타고 제천까지 가려고 하니 안동에서 얼른 표를 끊어오겠다고. 하지만 기사님께서 이 버스는 안동에서 사람만 내려주고 바로 떠난다며 다음 차를 타야 한다고 했다.

안동에서 픽업해주기로 한 사람이 제천으로 오라고 했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차비를 더 드릴 테니 제천까지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기사님께서 대답이 없다. 나는 그냥 자리로 돌아와 안동에서 내리지 않았다. 차가 출발을 하고 기사님께서 차비를 만 육천 원 더 내라고 하신다. 정말 고마웠다. 낯설고 시간이 늦은 안동 터미널엔 사람도 없었을 것이 뻔했다. 제천에서는 택시를 타든 어머니께 마중을 와달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두 시간 이상 남은 시간이고 마지막 종착지라 마음을 편히 먹고 잠을 청했다.


내리기 전에 차비를 준비하고 여행 중에 받은 간식봉투를 챙겼다. 버스에 내리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두 번했다. 차비와 간식을 건네며 “맛있게 드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간식을 일인당 하나씩 나눠주었는데 어쩌다 보니 두개를 챙겼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간식이 없었다면 말로만 고맙다고 할 뻔했다. 아마 이런 일이 있으려고 내가 간식을 두개 받았나 싶었다.


남편이 오려면 아직 한시간 반 이상 남았다. 터미널에서 책을 보면서 기다리려고 했다. ‘아뿔사’! 터미널은 8시까지만 문이 열린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큰 길로 나와 둘러보았지만 까페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짐작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둘러 매고 계속 걸었다. 내린 눈이 녹아 빙판이 된 곳도 있었고 하얗게 눈도 쌓여 있었다. 스카프를 단단히 목에 둘렀다. 얼음이 녹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날씨가 추운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내 마음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버스 기사님의 따뜻한 배려 덕분이었다. 약속이 틀어져서 속상했던 마음도 다 풀리고 오히려 몸이 따뜻하기까지 했다.


남편을 기다릴 장소를 물색하며 나는 계속 걸었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발목도 털어주며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고 어둠이 내려 앉은 시내에는 켜 놓은 간판 등만이 거리를 비추고 있다. 불이 환하게 켜진 맥도날드가 보인다.

어두운 밤거리를 무거운 가방을 매고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어깨가 가벼워진다.

“아메리카노 한 잔, 치즈 버거 하나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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