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 곤로
국민학교 입학을 얼마 앞두고 사택으로 이사를 했다. 사택이름이 일신아파트였다. 아버지가 다니시는 회사가 일신제강이었기 때문에 사택이름은 일신아파트
아파트라는 이름의 주소가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개학 초기 때마다 나눠주는 가정환경기록부에 아파트라는 주소를 가진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산 00번지였다. 방 두 개와 화장실과 방보다 훨씬 큰 부엌과 앞, 뒤 베란다가 있었다. 뒷베란다는 겨울에 연탄을 재놓는 곳이 있고 물부엌처럼 쓸 수 있었다.
사택으로 이사와 살면서 하나하나 살림이 늘었다. 어느 날에는 곤로가 들어왔고 어느 날에는 선풍기가 들어왔다. 가장 신나는 날은 초등학교 4학년쯤었나 냉장고가 들어올 때였다. 여름 내내 보리차를 시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오렌지 맛이 나는 가루를 사서 샤벳통에 얼려놓고 먹을 수 있었다. 시원한 수박화채도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회사에 다니셨고 엄마는 영등포 시장에서 옷장사를 하셨다. 두 남동생의 건사는 대부분 내 차지였다. 또래에 비해 살림을 거들거나 동생들을 돌보는 데 있어서는 성숙했다. 동생들의 밥을 차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간식 또한 내 차지였다. 하지만 국민학교 3학년이 만들 수 있는 간식이란 별로 없었다. 특히 밤이 빨리 오는 겨울날에는 먹을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과일은 귤이 전부였고 밥을 하고 눌은밥에 설탕을 뿌려먹는 것이 최애의 간식이었다. 나는 가끔 동생들에게 김치전을 해주었다. 김치전은 따로 간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밀가루반죽에 김치만 담갔다 프라이팬에 구워주면 되었다.
아파트라지만 겨울엔 부엌이 추웠다. 그땐 샛시를 한 집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바깥이 그대로였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앞, 뒷베란다에 눈비가 들어왔다. 시간이 좀 지나 졸대와 비닐로 샛시를 대신할 수 있게 하였다. 저녁을 먹기 전 출출함이 밀려올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얼른 김치 반포기를 꺼내 썰고 밀가루 반죽을 준비했다. 그러고는 부엌에 있는 곤로를 들어 안방으로 옮겼다. 식용 와 프라이팬 그리고 뒤집개와 접시 하나면 준비가 끝이다.
곤로는 성냥이나 라이터로 불을 붙여야 한다. 친구들 중엔 불 켜는 것이 무서워 곤로를 사용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땐 성냥불을 켤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자랑거리였다. '나는 너보다 용감하다.'는 암묵적인 자랑거리말이다. 심지가 보이도록 가운데 통을 올리고 불을 붙인다. 이때 심지 조절을 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란 불이 아닌 주황색 불이 올라오고 그을음이 나온다. 이리저리 심지 조절기를 움직이며 파란불이 나오도록 조절을 한 뒤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팬이 달구어지기를 기다린다. 남동생 두 녀석은 벌써 곤로 앞으로 바짝 붙어 앉는다. 멀건 밀가루 반줄물을 한 반을 떨어뜨려본다. 기름에 떨어진 반죽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들썩들썩한다. 김치전을 부칠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한 잎 크기로 썬 김치를 하나하나 반죽물에 넣고 뺴어 팬에 올린다. 지글지글 소리가 난다. 방안엔 기름냄새와 김치냄새가 가득하다. 동생들은 팬 위의 김치를 바라보며 군침을 다신다. 앞두고 김치물이 배어 나온 반죽이 노릇노릇 익으면 하나씩 꺼내어 접시에 담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입으로 가져가지만 뜨겁다. 동생들은 후후 불어 가며 김치전을 먹는다.
요새세상에 그렇게 전을 부쳐주면 누가 먹을까?
아무것도 안 넣은 하얀 밀가루 반죽물에 빨간 김치를 담가서 부쳐낸 김치전.
맵다고 연신 물을 마셔가면서도 맛있게 먹던 동생들. 올해는 막내가 오십 살이 되어 두 동생 모두 오십 대가 되었다. 멀리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독신인 막내는 명절에도 대근을 하다 보니 얼굴보기도 쉽지 않다. 이번 설에는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이번 설에 삼 남매가 모인다면 사십오 년 전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김치전을 해 먹여야겠다.
가진 것이 없어도 슬프지 않고 있는 것에서 행복을 찾던 그 시절이 문득 그리운 건 겨울밤이 깊어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