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한 칸, 부엌 한 칸에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를 하는 다주택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우렁찬 소리는 아니었다. 들릴 듯 말 듯 아기의 울음소리가 났다.
예정대로라면 7월에 태어나야 할 아이다.
21살 어린 새댁은 칠삭둥이를 낳고 몇 날 며칠 하혈을 했다. 아이는 너무 작고 까만 솜털에 쌓여있다. 너무 작아서 일주일 동안 씻기지도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칠삭둥이가 어린 새댁의 나이가 되었을 즈음 엄마는 칠삭둥이 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 낳고 하혈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 너는 너무 작아서 손목에서 팔꿈치 정도 크기밖에 안 됐어.
2 킬로그램이나 되었을까?
목욕을 시키면 살 껍질이 벗겨질 것 같아서 이불보에 싸놓고 일주일 지난 뒤에 겨우 씻겼지.”
“아직 배 속에 있어야 할 때라서 그랬는지 너는 계속 잠만 잤어, 가끔 ”애, 애“하고 울면 젖을 물렸는데 그러면 겨우 서너 모금 빨고 또 잠을 잤어. 계속계속 말이야.”
그렇게 따뜻한 봄날 엄마를 몹시 걱정시키며 태어난 딸이 바로 나다.
막내아들이 지금 24살이다. 그런데도 종종 잔소리한다. 추우니까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밥 굶지 마라. 길에 다닐 때 조심해라. 등등 군대까지 다녀온 아들이 아직도 미덥지 못하다.
21살의 어린 엄마는 검은 솜털이 소복하고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아이를 보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하루 내내 잠만 자는 미숙아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느라 정작 하혈로 밀랍 인형처럼 된 자신은 돌 볼 수도 없었던 엄마. 내가 꼭 효도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21살의 앳된 엄마와 돌쟁이인 내가 함께 찍은 돌사진
2살 때 집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칠삭둥이여서인지 몸은 또래보다 작았지만 2살, 5살 터울 남동생 둘을 항상 데리고 놀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는 든든한 살림 밑천 딸이었다.
1974년 나와 동생ㅡ나의 첫 컬러사진
서울이라고 하지만 당시 오류동은 반은 시골 반은 도시 같은 변두리 동네였다. 나는 산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진달래가 피고 아까시나무꽃이 필 때는 산에서 놀기 딱 좋은 때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살짝 시큼한 맛이 나는 분홍색 진달래는 무한 리필의 간식거리다.
분홍 진달래
오늘 점심을 먹은 식당 마당에 근사한 소나무가 있었다. 소나무 아래서 작은 솔방울들을 두 손 가득 주웠다. 그 모양을 보고 남편이 한마디 한다.
“관리도 못 하면서 또 뭐 하러 주워.”
“아니야, 쓸데가 있어요.”
솔방울
솔방울을 줍는 습관은 아주 오래되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산에서 많이 놀았다. 동생들과 갈 때도 있었고 친구들과도 자주 갔다. 소나무가 많던 그 숲에서 솔잎을 모아 푹신푹신한 카펫을 만들고 솔방울 두 개를나뭇가지로 연결하면 즉석 전화기가 되었다. 그렇게 만든 솔방울 전화기를 귀에 대고 건너 소나무 그늘집에 있는 친구와 깔깔대며 통화를 했다.송홧가루가 날리기 전 소나무꽃은 바바나처럼 생겼다. 소꿉놀이를 할 땐 소나무 꽃이 바바나 대신이었다. 상대적 박탈감 따위는 없었다. 필요한 건 뭐든지 뚝딱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산속에 솔방울 전화기와 솔잎 카펫만 있는 건 아니었다.
바나나송이를 닮은 소나무 꽃
방공호도 여러 개 있었다. 70~80년대 높은 학교 담벼락엔 ‘방공방첩’이라고 붉은색 페인트 글이 흔하던 시절이었다.뒷동산 방공호는 우리의 아지트로 안성맞춤이었다.예나 지금이나 나는 창의성이 뛰어났다. 방공호 위에 큰 나무를 얼기설기 얹고 그 위에 커다란 비닐을 덮었다. 드나들 수 있게 출입구도 만들었다. 사다리 비슷한 것도 가져다 놓았다. 그 덕에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었다.
바닥에는 솔잎을 깔고 그 위에 못 쓰는 돗자리를 깔았다. 거울 조각. 돌멩이, 공깃돌, 딱지, 구슬 등 소중한 나의 보물들을 가져다 놓았다. 콜라병에 꽃이나 억새도 꽂아 놓았다. 깨진 항아리 조각, 조개껍데기는 훌륭한 그릇이 되었다. 깨진 화분 조각은 곱게 빻아 고춧가루를 대신했다.
조개껍질
꼬맹이 서너 명은 충분히 들어갈 만큼의 공간이었다. 자궁 회귀의 본능을 나는 그렇게 풀어내었던 것은 아닐까? 조금은 어두운 방공호 안은 당시로는 완벽한 아지트였다. 전쟁이 나면 몸을 보호하려 파놓은 방공호는 그 기능을 상실한 채 오롯이 우리의 비밀장소가 되었다. 그 속에서 웃고 떠들던 그때가 그리운 것은 왜일까? 사실 그립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 방공호에서 다시 놀래?” 하고 물으면 아마 아니라고 대답하겠지. 지금은 몸도 커졌고 더 좋은 곳이 있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방공호(대물님 블로그)
분홍의 고운 빛과는 달리 시큼털털한 맛의 진달래꽃이 지고 나면 동산은 하얀 아까시나무 꽃향기로 가득했다.하얀 팝콘 같은 꽃송이들이 주렁주얼 달린 채 달콤한 향가를 내뿜었다.
꽃이 피기 전 나무 밑동에서 갈색으로 올라오는 아까시나무순 맛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갈색빛이 나는 고구마 순에 비유하면 상상이 될까? 그렇게 부드러운 순의 갈색 껍질을 벗기면 초록 속살이 나온다.
순을 딸 때 잘못 따면 뻣뻣하고 억새다. 나무 맛도 많이 난다. 꼭 휘청휘청 야들야들한 순을 따야 한다. 무슨 맛일까 궁금하겠지만 무슨 맛이 있겠는가. 그것은 그저 나무의 순일뿐인데.
아까시나무는 쑥쑥 잘 크는 나무라 순 따먹는 일은 잠시뿐이다. 순과 꽃은 간식으로 따먹고 잎은 훌륭한 놀잇감이 되었다. 아까시나무 꽃이 흐드러지면 어머니와 나는 보자기 가득 꽃을 따다 말려서 차를 끓여 먹기도 했다. 나뭇잎이 여러 개 달린 잎은 가위바위보를 해서 한 잎씩 떼어내기도 하고 혹은 엄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튕겨 잎을 떼기도 했다. 운이 좋으면 한 번에 두세 개씩 떨어지기도 하지만 운이 없을 땐 그냥 한 잎 떼어낸 것만 못하기도 했다. “꽝”이다.
팝콘같은 아까시나무꽃과 잎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때론 잎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좋아하는 이성 친구의 이름을 생각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속삭임과 함께 발아래 둥근 초록 잎이 포르르 떨어진다. 그게 뭐라고 ‘좋아한다’라는 말로 마지막 잎이 떼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아까시나무잎을 떼어냈을까.
때로는 나뭇잎 자루 쪽부터 죽 훑어 잎을 다 떼어내고 머리카락을 조금씩 잡아서 줄기에 빙빙 감아 묵어놓았다. 한 참 놀고 집에 갈 때쯤 줄기를 풀어보면 방금 미용실에라도 다녀온 양 머리가 꼬불꼬불했다. 잠도 들기 전에 풀어질 웨이브였지만 잠시 꼬불거리는 머리카락 덕에 마치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꽃도 따먹고 잎으로 사랑점도 치고 줄기로는 파마까지 할 수 있는 요긴한 간식거리이자 장난감. 쓰레기조차 남기지 않는 친환경 장난감이 되어주던 아까시나무. 다른 나무를 죽이게 하는 성향 때문에 한때 천덕꾸러기로 미움받던 아까시나무가 나에게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나의 어린 시절, 허리가 잘록한 마로니 인형,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소꿉놀이 장난감도 없었다. 그러나 엄마가 만들어주신 헝겊 인형 하나, 옥수수 인형, 조개껍데기 그릇만으로도 너무나 풍요로운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