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2019년 4월 천사대교가 연결되어 언제든 쉽게 드나들 수 있지만 이사 와서 3년 정도는 배를 타고 다녀야 했다.
천사 대교가 완공 전 모습 중간이 연결되지 않았다. 배에서 찍은 다리의 모습
나는 남편보다 1년 정도 먼저 들어와 섬생활을 시작했다. 6개월 정도는 친정엄마가 오셔서 지내셨다. 한 달에 한두 번 남편은 오갈 때마다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남편은 돌아갈 때마다 눈물을 보이거나 울적해했다. 이런 집에 아내를 두고 가니 마음이 아팠나 보다. 주로 선창에서 이별을 했지만 몇 번은 같이 배를 타고 갔다가 나 혼자 다시 배를 타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면 25분 정도 더 같이 있을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소문난 닭살 부부이다. 섬마을에서 서로에게 “여보.”라는 호칭을 쓰는 부부가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에게
“여보.”
라고 부르면 주변에서 놀리느라 흉내를 내기도 한다.
2020년 1월 1일 해맞이 후 하산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아마 나는 귀신에 씌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집을 구입했을 리가 없다. 이 집을 사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까? 이 집 때문에 친정어머니가 많이 고생하셨다. 70이 넘은 나이에 시멘트를 나르고 돌을 나르고 슬레이트 지붕을 해체하셨다. 결국엔 무릎에 무리가 가서 고생하셨다. 집을 소개해준 사람도 이렇게 말했다.
“귀신 나오게 생긴 집이 하나 있긴 한대 한 번 보겠소.”
집계약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부엌도 없었고 화장실도 없다.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길은 좁아서 차도 들어오지 못한다.
그날 나는 무슨 귀신에 정신이 팔렸던 걸까?
귀신 나올 것 같다고 한 집
처음 집을 봤을 때 모습, 흙벽이 많이 무너져있고 창호지도 다 떨어졌다. 창고문도 다 떨어져 간신히 붙어있다.
집은 지은 지 70년 정도 되었고 빈집으로 15년 정도 된 집이었다. 방이랑 창고에는 아랫집 할머니가 참깨대랑 콩 대들을 넣어 놓았다. 벽지는 낡았고 창호지를 붙이는 창살문은 군데군데 이가 빠져있었다. 집은 몹시 낡았다. 흙벽도 군데군데 무너져있었다.
문도 벽도 온전하지 않다
집은 오롯이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옛날 시골에서 보았던 흙집이었다. 못 하나 없이 나무와 나무로 짜 맞춘 집(대목수가 지은 한옥집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 집이 시멘트로 지어진 집이었다면 미련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한옥을 좋아한 나는 집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가난했고 550만 원이라는 집값은 도시에서 살던 부부에게는 너무나 싼 가격의 집이었다.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집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예쁘게 고쳐서 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별로 변한 것이 없는 집에 살고 있다. 다시 사진을 봐도 내가 얼마나 무모하고 용감했는지 알 수 있다.
섬에 와서 550 만원을 주고 산 집 이 집도 빚을 내어 샀다.
남편은 사업만 하던 사람이다. 험한 일을 해보지 않은 남편의 손은 나보다 훨씬 고왔다.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고 섬으로 들어오기 얼마 전부터는 식당일과 현대제철에서 필터를 제거하는 일을 했다. 남편이 시골 섬마을에 들어와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은 운전면허가 없었다. 사업을 크게 할 땐 기사가 있었고 이후엔 나와 늘 2인 1조로 다녔다. 흔히 말하는 실과 바늘이었다. 도시와 달리 시골은 버스가 자주 있지 않아서 면허는 필수였다. 매번 남편과 동행할 수 없었다. 나라도 생계를 책임지려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섬에서 매번 목포까지 배를 타고 왕복을 하면서 면허를 따는 것은 비용과 시간 모두 비효율적이었다. 당시 남편은 당진에 있었는데 떨어져 지내는 것이 싫었지만 그곳에서 면허를 딴 뒤에 들어오기로 했다.
섬마을 닭살부부, 우리 부부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있다.ㆍ정읍 구절초 공원에서
이렇게 섬마을에서 나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가스도 물도 전기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것들을 갖출 돈이 없었다. 얼마간 나는 초를 켜고 생활을 했다. 잠들기 전엔 혹시 불이 날까 봐 꼭 끄고 잤다. 낮에 직장에서 핸드폰을 충전해 와서 저녁에 잠시 유튜브를 보았다. 섬생활에서의 유일한 낙이었다.
낡은 벽지를 뜯어낸 방은 몇 십 년은 된 흙벽이 드러났고 천정은 용마루가 깨져서 흙덩이가 덜렁거렸다.
2019년 뜨거운 여름, 내가 촛불을 켜고 모기장 쳐놓고 지낸 방의 모습. 지금도 벽과 천정은 그대로이다.뒷문 앞으로 톱이 보인다.
비가 요란하게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흙이 떨어졌다. 처음 얼마간은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서 혹시 흙덩이가 얼굴 위로 떨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여름에는 종종 그 틈에서 지네가 떨어지기도 한다. 지네가 방에 출몰한 날은 며칠 동안 노이로제 증세가 생긴다. 괜히 옷자락이 다리를 스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실제로 지네에 물리기도 했다. 천만다행으로 지네에 알레르기가 없어서 모기에 물린 정도의 가려움으로 독은 사라졌다.
여름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방바닥이 뜨근했다. 황토찜질방이 따로 없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 자물쇠하나 채울 수 없는 작은 방. 이곳에서 나는 어떻게 혼자 지낼 수 있었을까? 나는 왜 그렇게 용감했을까? 나는 어떻게 이런 곳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사랑의 힘'만으로 설명이 될까?
이사 오고 얼마 안돼서 옆동에 사는 동생 둘이 놀러 온 적이 있다. 그때 동생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언니, 나는 이제 신랑한테 감사하며 살기로 했네. 언니집에 와보니까 우리 집이 얼마나 좋은지 깨달았네.”
우리 집 천정은 본의 아니게 동생 자신의 현재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그 동생은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좋은 집에 살고 있었다.
딸이 혼자 외딴곳에서 생활하는 게 걱정이 되셨던 친정어머니께서 오셨다. 모녀의 섬마을생활이 시작되었다. 밥은 휴대용 버너에 해 먹었다. 이삿짐을 다 가져오지 못해 냉장고도 없었다. 냉장고가 있다고 해도 전기가 없어 켤 수도 없었다. 2016년 여름은 112년 만에 찾아온 불볕더위였다. 대구는 40도가 넘는 날도 있었다. 그 뜨거운 여름을 선풍기도 없이 그렇게 지냈다.
휴대용 가스에 밥을 해 먹고 그릇 몇 가지를 올려놓았던 마루의 모습. 잘 상하지 않는 장아찌가 반찬이었다. 하얀 통은 식수를 받아놓은 통이다
더위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별의별 종류의 모기였다. 사실 이곳에 내가 자리를 잡게 되면 부모님과 남동생 가족이 모두 내려오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한해 여름을 보내고 어머니는 모기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다음 해 여름이 오기 전 모기가 없는 단양 본가로 가셨다.
어머니와 나는 일주일 정도 집안팎의 쓰레기를 정리했고 날마다 마당에선 연기가 타올랐다. 도시 생활의 미련도 연기와 함께 떠나보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몸에서는 연기 냄새가 진동을 했다. 동네에선 하루 내 쓰레기를 태우고 망치질을 하고 톱질을 하는 모녀가 궁금했는지 대문이 없는 마당에 들어와 이런저런 코치를 하며 둘러보고 가곤 했다. 마당 입구 쪽에서 쓰레기를 태우다가 마당 끝 구조물로 쓰레기 태우는 장소를 옮겼는데그러 던 중에 그곳이 재래식 화장실인 것을 알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화장실을 발견한 것이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재래식 화장실은 여러 번 쓰레기를 태우면서 뜨거운 화력에 소독이 저절로 되었다. 화장실이 없어서 불편했던 우리 모녀는 그것도 행운으로 여겼다.
하루는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딸, 힘들지 않아? 많이 불편하지?” “엄마, 나는 괜찮아요. 엄마가 나 때문에 고생하시지. 나는 캠핑 왔다고 생각해요. 언제 이렇게 길게 캠핑을 와보겠어요. 그래도 텐트 생활보다는 낫잖아요. 비도 햇볕도 피할 수 있는 지붕이랑 벽이 있으니까.” “역시 엄마딸이다. 초긍정. 엄마딸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