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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올 Jan 03. 2024

나는 날라리가 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불우한 경험이 인생을 결정짓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어른이 된 지금 나의 삶을 결정짓는 것일까?

종종 TV에서 흉악범들의 사연을 접하게 된다. 범죄 심리학자들이 나와서 이 사람이 왜 흉악범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분석을 한다. 그러면 대부분 공통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이 불우했다는 이야기이다. 부모의 부재 폭력, 경제적 곤란 등이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반대로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절대로 범죄자로 클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럼 무엇이 이 사람들을 범죄자로 만든 일까?     




나의 어린 시절도 되돌아보면 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어머니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학생이었던 시절 늘 전교 1등을 했다고 하신다. 어느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너는 제대로 공부하면 나라도 팔아먹을 녀석이다.”

라고 말이다. 1960년대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성적에 상관없이 학업에서 밀려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 역시 머리가 너무 좋았고 심지어 학비를 대 줄 테니 계속 공부를 하자고 하시는 선생님도 계셨지만 자존심이 강했던 어머니는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 또래가 그랬듯이 남자 형제들을 위해서 취업을 나갔다. 어머니는 종종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는 말을 하셨다. 아마 그랬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수 도 있었겠지

어쩜 어머니의 자의식에는 ‘나는 이렇게 사는 게 맞지 않아.’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그런 생각들이 집을 떠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어머니는 종종 가출을 하셨다. 딱히 부부싸움을 하거나 빚쟁이에게 쫓기거나 뭐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겐 미스터리 같은 기억이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왔을 때 어머니가 안 계실 때가 있었다. 매번 어머니가 안 계실 때마다 가출을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엔 핸드폰이 없어서

“엄마 어디세요?”

라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그러다가 밤이 깊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그때야 엄마의 가출을 알아챘다. 이렇게 바람처럼 사라진 엄마는 짧게는 이삼일 길게는 두 달 정도 지난 뒤에 돌아오시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난 한 번도

“엄마, 어디 갔다 오셨어요?‘

라고 묻지 않았다. 왜 묻지 않았을까? 궁금하지 않아 했었나? 어디를 다녀왔는지 관심이 없었나?

아마 나는 엄마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주셨으니 ’그러면 됐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 없이 지낸 시간보다 지금 내 곁에 계신 엄마의 존재가 더 중요하고 좋았던 것 같다. 그냥 어린 나이였지만 ’ 다녀올 때가 있었겠지. ‘이렇게 생각했다.     


 내 인생 책 중 하나인 『인생의 태도』에서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선택”을 나는 어려서 몰랐고 읽지 않아 몰랐지만, 그 시절 나는 자신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던 건 아닐까?

 내 곁에 종종 계셔주지 않은 엄마를 미워하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엇나갈 수 있던 환경이었다. 그 시절엔 불량 청소년을 ’ 날라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날라리’가 되지 않았다. 환경이 그럴수록 나는 더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 가족은 회사 사택에서 살았다. 공동현관 하나에 여섯 집이 있는 3층짜리 건물이었다.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3층인 우리 집부터 시작해서 계단 물청소를 했다. 같은 라인에 사는 여섯 집이 동시에 청소했다. 그래서 꼭 약속을 잡고 청소를 해야 했다. 혹여라도 한 집이라도 비면 그 집 현관에 물이 찰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청소는 집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있었기에 주로 우리들의 차지였다. 물을 틀어놓고 3층부터 세제를 뿌려 하얀 거품을 내며 빗자루질했다. 3층부터 떨어지는 비눗물을 머리에 맞아가며 우리들은 즐겁게 청소했다. 사택이다 보니 아버지들끼리는 직장동료였다. 시골 마을이 아니었지만 서로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친척보다 더 친하게 지냈다. 그랬기에 어머니의 부재는 숨긴다고 숨겨지는 일이 아니었다. 옆집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너희들은 참 대견해. 엄마가 없어도 기 하나 죽지 않으니 말이야. “  

   

  엄마가 안 계실 땐 내가 엄마 대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큰 압력솥에 밥을 가득해서 동생과 내 도시락을 싸고 출근하시는 아버지. 등교하는 동생들의 아침 식사를 챙겼다. 어린 나이에 무슨 대단한 반찬을 할 수 있었겠을까? 된장찌개 김치찌개가 주 메뉴였다. 콩나물 나물에 두부 부침, 김치 볶음, 어묵 볶음이 다였다.


 첫 김치는 6학년 때 담갔다. 딱 40년 전 일이다. 어머니는 배추를 절여놓고 외출을 하셨는데 생각보다 귀다가 늦어지셨다. 집으로 전화가 왔다. 어머니 대신 김치를 담가보라는 전화였다. 첫 김치를 담그던 날 김치의 속으로 쓸 미나리를 다듬는 내내 거머리가 몇 마리가 나온 줄 모른다. 미나리 줄기에 붙어 검붉은 색의 몸이 줄었다 늘었다 했다. 다리에 붙은 거머리 때문에 얼마나 기겁했는지 소리를 꽥 질렀다. 그래도 눈 질끈 감고 미나리가 깨끗해질 때까지 여러 번 헹구어냈다. 우여곡절 끝에 김치는 완성이 되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나의 첫 김치는 너무 맛있게 만들어졌다.


 하교 후엔 동생들이 좋아하는 튀김도 자주 해주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호박 부침개를 부쳤다. 삼겹살도 아버지 월날에 딱 한 번 밖에 먹지 못하는 형편이었지만 나는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나는 늘 명랑한 소녀였다. 내 주위엔 늘 친구들이 있었다. 중학생이던 그때 친구들은 조다쉬 바지를 입고 나이키, 아디다스, 프로스펙스 신발을 싣었다. 나는 시장에서 산 옷과 운동화를 신었지만 메이커옷과 신발을 못 신었다고 속상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소비욕구가 없다.


중3 늦가을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내게 이렇게 묻으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엔 엄마 집에 잘 계시니? “

학교 선생님도 알고 계실 정도로 그렇게 어머니는 종종 부재중이셨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머니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하나도 없었다.

 어쩜 그 시절 우리 삼 남매보다 더 힘겨운 시간을 보낸 분은 아버지가 아닐까?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두고 아버지는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하셨겠다는 생각이 어른이 돼서야 들었다.


 엄마의 가출이라는 중대한 사건도 나를 비행 청소년으로 자라게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선택이다. 내가 바른 사람이 되겠다고, 행복한 사람이 되겠다고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그 선택권이 바로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보내겠다고 선택을 해본다.        


나는 오늘도 행복하기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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