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미국 작은 마을 이야기; 주의! 생각보다 재미있음
처음으로 소개하는 책은 미국 작가 켄트 하루프의 ‘축복’입니다.
이 책을 제가 가장 좋아한다거나,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거나 그런 이유는 전혀 없고 그저 제가 가장 최근에 빌려서 끝까지 재미있게(!!!) 읽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가능하면 최근에 우연히 제가 빌려 읽게 된 소설들을 중심으로 소개해나갈 예정입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저는 책 등의 제목을 보고, 출판사를 보고, 우선 여기까지가 마음에 들면 책을 꺼내어 앞표지의 느낌을 보고 다시 책을 뒤집어 뒷면에 짧게 요약된 내용과 나열된 서평들을 읽습니다.
또 거기까지 마음에 들면 책을 펼쳐서 앞의 한 두장쯤을 읽으면서 이 책이 지금 내가 읽고 싶은 책이 맞는지 최종 확인을 하지요.
별 특별할 것 없는 책 고르는 과정입니다.
다만, 그런 면에서 화려한 책의 커버를 제거했을 때 뒷면에 아무런 텍스트가 적혀있지 않은 책은 저에게는 썩 좋은 책이 아니에요. 책을 펼치기도 전에 한 번의 실망을 해야 하니까요.
평범한, 일상, 인생, 여름날, 쓸모없는, 세월.
이 책의 뒷면에 쓰여있는 단어들입니다.
이 날의 저는 조금은 잔잔한 기분이었는데 그 단어들과 아마도 결이 맞았던 것 같아요.
책을 펼쳐보니 병원입니다.
의사는 검사를 마친 할아버지에게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해요.
그의 아내는 그의 손을 잡고 ‘아직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그는 ‘떠나기 전에 좀 더 고급 맥주를 마셔볼까 봐요. 어떤 친구가 무슨 얘기 끝에 벨기에 맥주 얘기를 하던데. 벨기에 맥주를 마셔볼까. 근방에서 구할 수 있다면 말이오.’라고 말합니다.
떠나기 전에 고급 맥주를 마셔볼까, 말하는 할아버지가 저는 마음에 들었어요.
진지함과 유머가 동시에 느껴졌다고 할까요?
이런 할아버지라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는 무거운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들어볼 용기가 났습니다.
‘축복’은 대드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이건 스포일러도 아니지요.
‘축복’은 병원에서 시작해서 아마도 한 열흘, 아니면 일주일 동안 대디 할아버지와, 그의 가족과, 그의 이웃의 일상들을 천천히 따라가다가 할아버지의 숨이 멎고 전지적 작가의 서술이 함께 멈추는, 그런 책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한 마을에 사는 네 가족입니다. 대드의 가족, 대디의 옆집에 사는 버타 메이 할머니와 손녀 앨리스, 또 다른 마을 주민 윌라 할머니와 그녀의 딸 에일린, 마지막으로 이 마을에 새로 부임한 라일 목사의 가족이 그 주인공이지요.
책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러나 전혀 지루하지 않게 그려낸다는 점일 거예요.
잔잔하면서 동시에 흥미진진한 일상의 이야기로는 손에 꼽힐 만큼 차분하고, 재미있습니다.
잔잔하면서 흥미진진하다는 표현의 예를 들고 싶군요.
대드의 옆집에 사는 버타 메이 할머니의 집에는 얼마 전에 손녀 앨리스가 와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버타 메이 할머니의 딸이 죽은 뒤에 말이지요.
아마 이 마을엔 앨리스 같이 어린아이가 별로 없었나 봅니다.
앨리스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웃인 윌라와 에일린 모녀가 오직 그녀를 보기 위해 버타 메이의 집을 방문하거든요. 마치 연예인이 된 옆집 막내아들을 구경하고 또 그의 환심을 사보기 위해 집에 온 동네 사람들이 방문하는 그런 느낌으로요.
윌라는 30년 전에 남편을 심장마비로 잃은 후로는 오직 그가 없는 일상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온 지고지순한 로맨티시스트 할머니입니다.
반면 전직 교사였다가 이제는 엄마인 윌라의 집에 돌아와 함께 살고 있는 에일린은 수년 전에 잠시 그녀에게 들렀다가 가족에게 돌아간 유부남 외에는 별다른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다시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40대 여성입니다.
윌라와 에일린은 앨리스에게 한눈에 반한 것 같습니다.
버타 메이의 집에 놀러 와서 앨리스와 함께 노느라 늦은 시간까지 머물기도 하고, 앨리스만 데리고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주고, 옷을 사주고, 하물며 자전거까지 사주기도 하거든요.
저기, 오늘 앨리스를 데려가서 함께 점심을 할까 해서요.
오늘 그 애를 점심에 데려가신다고요?
네. 아주머니께서 괜찮으시다면요.
글쎄요. 모르겠네요. 그 애만 데려가신다는 말씀인가요?
오, 아니에요. 원하신다면 아주머니도 함께 가셨으면 해요.
그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뇨.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전 요즘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답니다. 오늘 그 애한테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아주머니께서 괜찮으시다면요.
난 괜찮아요. 하지만 아이 의견도 물어봐야죠.
pp.114-115
윌라와 에일린이 버타 메이에게 앨리스와 함께 외출해도 되겠냐고 묻는 장면입니다.
이 부근을 읽을 때 제 눈과 손은 빨라졌습니다.
어딘가 의뭉스럽게 느껴지는 모녀의 제안을 들으면서 윌라와 에일린이 앨리스를 납치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이후 아무 이유도 없이 앨리스에게 점심에, 옷에, 자전거까지 사주자 그 의심은 계속해서 증폭되었죠.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앨리스는 아주 조심스러운 소녀여서 이런 것들을 받아도 되는지 걱정하고, 집에 있는 버타 메이 할머니에게 전화해서 묻기도 하지만 할머니는 괜찮다고 말해요.
긴 외출 끝에 앨리스는 집에 안전히 돌아오고요.
자극에 익숙한 저는 잔잔한 일상 이야기를 심리 스릴러로 바꾸어서 혼자만의 롤러코스터를 몇 번이나 탔을 뿐입니다.
이 외에도 목사 라일의 아들의 밀회 에피소드나, 에일린의 과거 연애사 등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잔잔하고 조용한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고 매력적입니다.
이렇게나 책이 잘 읽히는 것은 저자인 켄트 하루프의 글 솜씨 덕분입니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섬세하고, 일상적입니다.
특히 그의 대화문들이 저는 인상 깊었어요.
윌라 할머니가 남편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잠옷에 외투를 걸치고 손전등을 들고 밖으로 나갔는데 남편이 눈을 뜬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저라면 ‘밖으로 나갔는데 남편이 눈을 뜬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라고 말했을 것 같은데 윌라 할머니, 혹은 켄트 하루프는 잠옷에, 외투를 걸치고, 손전등을 들고, 라는 단순한 세 가지 상황 설명을 추가함으로써 윌라 할머니의 성격을 보여줄 뿐 아니라 내가 윌라 할머니와 함께 그 순간에 있을 수 있도록 만들었지요.
또 죽음에 가까워진 대드가 의식을 잃고 계속해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대드의 아내와 딸의 대화도 인상적입니다.
겁나지 않으세요?
그럴 리가 있니. 이 사람은 내 남편이야. 난 평생을 이 남자와 같이 지냈단다. 반 세기도 넘는 시간 동안 말이야.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이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지금 이곳에 계셔도 괜찮겠어요?
그럼 얘야. 여기서 내가 겁낼 건 없단다. 내 앞날이 두려울지는 몰라도 이 방에 있는 이 남자가 겁나지는 않아.
pp.431-432
특별할 것 없는 단어들로, 아주 일상적인 표현과 문장으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글을 쓰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저는 이 대화가 너무도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현실처럼 느껴지다가도 현실에서 이런 모습의 가족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하고는 이 장면이 소설적인 것인지 현실적인 것인지 순간 혼란스러웠습니다.
‘축복’은 아름답고 평범한 일상과 사람과 대화들로 가득 채워진 책입니다.
그 이전에 매우 잘 읽히는 재미있는 책이기도 하고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거나, 가족에 대해 생각하고 싶거나, 좋은 책을 읽고 싶은 분들, 아니 사실은 모두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