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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Feb 27. 2021

어떤 간판의 이야기

<나의 기억 현상소> 제4화

옛적엔 온 강산이 금수(錦繡) 같았던 순정한 나라에 세 번째로 장군 출신이 대통령 권좌에 앉아 있을 때의 일이다. ‘대’ 검찰청 공안부는 전교조(전국교직원 노동조합)라는 단체가 사무실 입구에 달아놓은 간판을 떼라는 지시를 전국 각지의 ‘소’ 검찰청으로 내려 보냈다. 전교조는 노동조합이 아닌데 노동조합이라고 간판에다 써 놓았다는 것이다. 간판은 노동조합법 위반이고 벌금 20만 원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중고교 학생들이 제 명찰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이름을 새긴 가짜 명찰을 달고 다녀도 별일 안 생긴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충청도의 한 검찰관은 확인에 나섰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자신이 일하는 검찰청사 바로 앞 건물 2층 유리창에 ‘전교조 △△지부’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선팅 되어 있었다. 불문곡직에 일사불란이 조직의 전통이었지만 웬일인지 검찰관은 ‘우리 동네엔 전교조 간판 없음’이라고 보고해 버렸다. 이 검찰관은 그 뒤 조직을 떠나 초대형 기업의 돈 많이 주는 자리로 옮기고는 거기서도 자신의 더러운 손을 씻는 사고를 쳤던 것인데 그것도 나중의 일이다. 


어떤 소식통에 따르면 전라도에서도 간판을 떼라는 상부 지시에 응하지 않은 검찰관이 있었다. 불응 이유는 이랬다. 이 지역의 특별한 지역정서 때문에 또 다른 공안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음. 대검도 통 크게 이를 용인했다. 


그러나 지시대로 법대로 즉각 행동에 나선 검찰관도 있었다. 그는 전투 경찰 2개 병력과 노동부 직원 수 십 명을 앞세우고 '전교조 ◇◇지부'라 새겨진 송판 간판을 향해 돌진했다. 전투경찰로 말하면 얼마 전 한낮의 서울 거리에서 한 대학생을 방패로 때려죽인 바 있는 조직이었고 노동부로 말하면 막강한 재벌과 정치권력을 뒷배로 하고 있었지만 맨손의 선생들은 간판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싸웠다. 간판이 초롱한 눈망울의 어린 제자라도 되는 양했다.   


그들이 깃발과도 같은 그 간판을 처음 단 것은 3년 전이었다. 그 간판 하나를 지키기 위해 1500여 명의 선생들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도 감수했었다. 바보와 성자는 동의어가 될 때가 있다. 검찰관에게는 바보고 초롱한 눈망울의 학생들에게는 성자였을 지도 모르는 그 선생들의 간판을 검찰관은 기어이 떼어냈다.  


며칠 후 선생들은 지방노동청으로 항의 서한을 보냈다. 바보라서 그랬을까? 그들의 상당수는 전투경찰에게 구타를 당했고 4명은 안경까지 부서졌는데도 검찰총장이나 경찰청장을 형사 고발하지 않고 노동청에 편지를 보낸 것이다. 노동청 직원들을 철부지 학생으로 오인이라도 한 것일까? 그 선생들은 편지에다 썼다.


노동청은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운운. 즉 앞으로는 착하게 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끝맺었다. 


…… 간판의 반환을 촉구하는 바이다.


1992년 벽두, 부산에서의 일이다. 세상엔 하고 많은 간판이 있지만 그날의 간판은 간판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영혼이고 심장이었다. 그래서 장군 출신 대통령과 그 수하들은 그토록 그걸 탈취하고 싶어 한 건 아니었을까? 그들에겐 영영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그것이라서 오히려 더 절실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이태리 영화 '길'(La Strada)의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는 오래전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비정한 무쇠의 사나이 잠파노는 순정한 영혼의 소녀 젤소미나가 영영 사라지고 나서야 심장을 쥐어뜯으며 오열했었으니까.  


존재는 부재를 통해서야 비로소 또렷해지는 법이다. 잃어보지 않고는 온전히 얻을 수도 없다는 것. 우리 인간의 비극적 숙명이다. 


그 간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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