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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Feb 19. 2022

하늘나라로 띄우는
로마 결혼식 이야기 (2)

나의, 로마로 가는 길 : 제5화

  

‘1948면 12월 23일(음력), 18세의 어머니는 23세의 청년 윤성수와 혼례를 올렸다. (…) 신랑은 처가로 와서 혼례를 치르고, 신부는 사흘을 친정에서 지낸 후 시집으로 신행을 나가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다. 어머니가 사흘 후 시집으로 가는 날은 혹독하게 추운 날씨였다. 신혼부부와 육촌 오빠 셋이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우선 구미까지 나갔다. 구미로 가려면 낙동강을 건너야 했다. (…) 강변으로 나서니 눈바람이 세차게 불어 얼굴을 때렸다. 신랑·신부·상객 이렇게 셋으로 구성된 신행 일행은 칼바람 부는 얼어붙은 낙동강을 걸어서 건너서 구미로 향했고 구미에서 요기를 했다. 그곳에서 시집이 있는 선산 봉한동까지는 5킬로 정도였는데 구미까지 오느라 지치고 아픈 다리를 끌고 삼거리까지 오니 가마꾼들이 나와 있었다. 어머니는 거기서 가마를 타고 시집으로 향했고, 봉한동에 도착했을 때 가마에서 내려보니 서쪽 하늘에 석양이 비치었다.’   

  

어머니, 알고 계시지요?   

    

지난가을 당신의 ‘장한 맏아들’이자 저의 둘도 없는 형님은 어머니를 땅에 묻고 난 후 온 정성을 다해 ‘매훤당 장훈식 평전’을 써내려갔더랬습니다. 제가 막 읽어드린 것은 그 평전 앞부분의 한 대목이지요.   

   

형님의 절절한 ‘사모곡’으로서 평전은, ‘낙랑 18세’의 어린 신부가 눈보라를 헤치며 신행을 간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일 년 반 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이념 대립, 동족상잔의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머니의 부모 형제와 25세의 신랑인 아버지, 그리고 어린 신부를 참 아껴주셨다는 어머니의 시아주버님까지 이승만을 필두로 한 친일 반공주의자, 우익 테러분자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초와 죽임도 당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가족사를 아프게, 정말 아프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어머니는 책망하실 것도 같습니다. ‘우리 손녀 주희 결혼식 날 이야기를 해준다더니 까마득한 옛날의 어미 신혼 때 얘기는 왜 꺼내느냐’고요. 그래요. 정말 그렇지요. 저도 로마의 하늘 아래에서 형님의 어머니 평전을 다시 펼쳐보게 될 줄은 몰랐답니다.  

    

그런데 어머니, 거기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말씀드린 대로 로마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 주희가 피로연 끝자락에서 ‘신부의 말’ 차례가 오자 이렇게 말문을 열었던 것이니까요.    

     

“저는 사랑과 운명을 믿는 이상론자입니다. 자주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이탈리아에 오지 않았다면,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아가 우리 부모님이 그들의 부모님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또한 한국 그리고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없었다면, 우주가 한 점에서 폭발하여 지구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안드레아와 만나서 사랑을 할 수 없었겠구나…….”   

   

어머니. 그 순간에 말이지요, 꽃피는 봄날의 제 결혼식이, 또한 18세 어머니의 저 겨울날의 혼례가 연이어 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답니다. 그래서 로마의 숙소로 돌아와서는 어머니 평전을 다시 꺼내 읽게 되었고요.   

   

운명이라면 운명 아닌 것이 없고 우연이라면 우연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긴 해도 주희가 자신의 결혼을 제 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 나아가 유구한 인간의 역사, 영원한 우주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려는 모습은 전 보기가 좋았군요. 

주희는 또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이 글을 적으면서 ‘나는 왜 안드레아와 결혼을 하려는 걸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어요. 사실 이런 질문을 결혼식 전날에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그 답은 금방 나왔어요. 물론 안드레아는 굉장히 다정하고 헌신적이고 잘 생겨서 제가 반할 구석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지만 결국 제가 이 친구와 평생 함께 지내고 싶었던 이유는 ‘나를 온전히 나 자신으로 있게 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어요. 안드레아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안드레아와 함께 있던 시간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어요.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처럼. 안드레아와 함께 있던 시간 동안 저는 예뻐질 필요도 완벽해질 필요도 없었어요. 매번 안드레아는 ‘너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고, 완벽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요. 안드레아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는 평생 이 사람 옆에서 그것을  배우며 살아가고 싶답니다.”  

   

저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울컥 눈물이 솟구칠 뻔도 했고요. 어찌 안 그럴 수 있었을까요? ‘안드레아는 나를 온전히 나 자신으로 있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주희는 ‘안드레아를 사랑하는 일은 곧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고 또한 나를 사랑하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혼자, 내심 소리쳤습니다. 그럼 됐다, 아무렴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주희의 말 사이사이에 꼭 필요한 디딤돌처럼 이어진 신랑의 말들도 저로선 이쁘기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주희와 처음 데이트를 하던 날 ‘여덟 살 난 어린애라도 된 양’ 젤라토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는 얘기며 (이때 사람들은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더군요), 자신은 ‘하늘에다 더 나은 부모를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는 유머러스한 표현이며, 저와 아내, 또 소희와 한 가족이 되어 너무 기쁘다는 진심 어린 인사며, 현재 자신과 주희는 매우 바쁘고 매우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것……등등을 그야말로 ‘알레그로 조’로, 분명하고도 경쾌하게 이야기해 나갔으니까요. 안드레아의 친구들은 중간중간 박수도 치고 애정 어린 야유의 휘파람도 날렸답니다, 하하하.  

    

그런데 결혼 피로연 자리, 가장 가까운 친지들 앞에서 안드레아가 빼놓지 않고 회상해야 했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 

      

“주희와 나, 우리 5년의 역사에도 '정말 어려운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9개월간의 별거’였다. 한국과 로마에서 우리는 각각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서로를 느꼈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 어머니, 신랑과 신부가 번갈아 가면서 읽어 내려간 인사의 말은 한국어, 영어, 이탈리아어가 다 동원되었다는 건 아실 필요가 있겠네요. 안드레아는 이 말을 영어로 했고 (아니 이탈리아어로 했을 수도요. 기억이…) 이를 주희가 한국어로 통역을 했답니다.   

   

‘9개월간의 별거’……! 


그것은 로마에서 여행 가이드로 일한 지가 3년이나 된 주희가 회사로부터 한 달 정기 휴가를 받아 우리나라로 들어온 2019년의 일이었습니다. 애초 2월 한 달만 있다가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2월이 다 지나가는데도 다들 곧 잠잠해지겠지 했던 ‘코로나 사태’는 점점 심각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었지요. 그예 주희는 ‘코로나 덕에’ 몇 년간 혼자 객지에서 일한다고 힘들었을 몸과 마음을 고국에서 좀 길게 푹 쉬고 가자, 했던 것인데 그게 안드레아가 말한 ‘정말 어려운 순간'으로서 ‘별거’의 아홉 달이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동안 제 처와 저는 큰딸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좋았지만 한 번씩 묻곤 했답니다. “너 언제 갈 거니? 네가 안 돌아올까 봐 안드레아가 노심초사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대개 별말을 않고 빙긋이 웃던 주희가 한국도 이탈리아도 갈수록 더 심해지는 그 코로나를 뚫고 안드레아의 로마로 돌아간 것은 그해 11월이었지요. 그간 아르바이트도 하고 장래 로마에서 살게 되면 필요할 수 있는 한국어교원자격증도 후딱 취득해서 말입니다. 그것도 벌써 옛일이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이제 다시 결혼 피로연 얘기로 돌아갈 게요, 어머니. 아직 해 드릴 이야기가 꽤나 더 있거든요.       


피로연은 결혼식장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의 한 식당(주희 말로는 이탈리아식 정식 백반집 정도에 해당한다는 ‘Hosteria’)에서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엔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진 ‘진실의 입’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성당도 있고, 고풍스러운 고대 유적지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널따랗게 펼쳐진 로마 시대 마차 경주장도 있는 그런 곳이었답니다. 

      

모인 사람은 신랑·신부에 제 식구 셋, 사돈 내외, 그리고 꼭 참석하겠다며 초대에 응한 안드레아의 친척과 친구들, 소식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는 주희의 여행사 친구 동료와 그녀의 이탈리아 남자 친구 해서 모두 22명이었습니다. 그 수에 딱 맞춤한 넓이의 오붓한 식당에서 우리는 연한 식전 포도주로 시작해 세 종류의 스파게티, 잘 구운 스테이크 등이 차례로 서빙되는 이태리식 ‘백반’을 먹으며 삼삼오오 시끌벅적 정담을 나누었는데요, 그게 대충 두 시간은 넘었을 겁니다. 아내와 소희는 연신 포도주 잔을 비우는 저를 보고 ‘곧 사람들 앞에서 덕담을 해야 하잖아요’, 짐짓 걱정도 했지만 하하, 그 기쁜 날에 제가 어찌 술잔을 마다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머니? 바깥사돈은 두 번이나 포도주병을 들고 제 테이블로 와서 ‘건배’를 청했고 (안드레아 친구들 대부분이 우리말 ‘건배’를 알더군요), 사위 안드레아도 기회를 보아 제게 와선 ‘두 손으로 공손하게’ (그런 한국식 예법은 주희가 가르쳤다지요) 장인어른인 제 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연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말입니다.

     

제가 이탈리아어로 준비해 간 덕담을 마침내 하게 된 것은 그런 두어 시간이 끝난 바로 직후였습니다. 말하자면 피로연 2부 순서 첫 타자가 저였던 거지요. 이탈리아에선 원래 신부 아버지의 ‘연설’을 가장 먼저 듣는다고 하더군요. 이탈리아 사람들 앞에서 떨리진 않았느냐고요? 포도주 덕이었는진 모르지만 그렇진 않았답니다, 하하하.    

   

그럼 제 덕담을, 의례적인 인사 같은 건 좀 빼고서 들려드리도록 할게요. 

         

나는 지금 너무 기쁩니다. 사랑하는 나의 딸 주희가 안드레아 스타라체를 만나 아름다운 도시 로마에서 결혼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참으로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안드레아는 착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명랑한 청년입니다. 또한 미남이기도 하고요. (이 말에 안드레아는 얼마나 겸연쩍어하던지요)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나는 안드레아가 내게 한 말을 기억합니다.      

“나는 현재에 행복하고 충실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나의 물음에 대한 안드레아의 대답입니다. 예로부터 ‘현재(presente)야말로 가장 좋은 선물(presente)’이라고 했지요. 이런 안드레아를 나는 사랑합니다.  

    

안드레아를 낳아주신 안드레아의 부모님, 페데리코와 엘리에게도 감사와 사랑의 인사를 다시 드립니다. (하면서 저는 두 분에게 눈길을 던졌지요) 당신들은 안드레아를 너무나 잘 키웠습니다. 안드레아의 많은 좋은 점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고 또 배운 게 틀림없습니다.       

또한 당신들은 나의 사랑하는 딸 주희를 너무나 아껴주시고 사랑한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주희가 한국의 부모님과 꼭 같이 이탈리아의 부모님을 잘 모시고 공경하고 사랑하리라 믿습니다.      


그런 후 저는 신랑·신부에게 한 가지 당부도 했답니다. 혹여 고난에 처할 때면 이탈리아의 대문호인 단테의 다음과 같은 시구절을 기억하라고 말이지요.    

     

‘사람들이 뭐라든 내버려 두고 굳건한 종탑처럼 서라, 바람이 아무리 심하게 불더라도.’

   

이탈리아어 원문을 인용했는데요, 이탈리아 사람들 앞이니까 꼭 그러고 싶었던 겁니다. 덕담을 마무리하면서도 저는 단테의 다른 시구절을 하나 더 인용했습니다.     

 

‘(천국은 멀리 있지 않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쫓겨난) 우리 곁에도 천국을 남겨 두셨으니 그것은 바로 꽃과 아이와 (밤하늘의) 별이다.’

 

괄호 부분은 제가 설명으로 덧붙인 것입니다만,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지요? 저는 두 신랑·신부가 꽃과 아이와 별들의 존재 의미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내내 행복한 삶을 가꾸어 나가기를 기도하는 마음에서 이 시를 낭송한 것이랍니다.  

    

휴, 편지가 좀 길었습니다. 제 덕담이 끝나자 결혼장에서도 눈물을 보였던 페데리코가 포도주병을 들고 저에게 와서는 자기 손가락으로 눈시울을 짚으면서 ‘나 이렇게 또 눈물이 났소이다….’ 하던 얘기며 안드레아의 친한 친구 둘이 나와 연극식 대화로 축하의 말도 하고 노래도 불러준 얘기며, 두 사돈은 물론이고 안드레아의 팔순 고모님과 옛날엔 영화배우였다는, 일흔의 나이에도 그 미모가 그대로인 것만 같은 이모님과도 몇 번이나 포옹을 하며 (정말이지 이탈리아 사람들은 포옹의 대가였네요) 눈빛과 정담을 나눈 얘기며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은 어머니께서 잘 쓰신 표현처럼 ‘여산여해(如山如海)이나’ 아무래도 이쯤서 마무리를 해야겠지요?      

다음 편지에선 주희가 다프네(Dafne)라고 이름부터 지어놓은, 꽃다운 아기를 낳은 얘기를 하게 될 텐데, 벌써부터 기다려지시지요? 그날까지 하늘나라에서 내내 안녕하시실 두 손 모아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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