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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Feb 27. 2022

나는 로마에 닿을 수 있을까

나의, 로마로 가는 길 : 제6화

큰딸의 결혼식과 임박한 출산 소식에 로마로 온 지도 한 달이 낼모레다. 그 사이 결혼식은 무사히 치렀고 이제 손녀가 응앙, 울음을 터트리며 사바 세상에 출현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인데 내 마음은 좀 흐렸다 개었다 한다. 석 달 예정으로 세낸 타국의 좁은 아파트에서 별일 없이 지내야 하는 일상이 답답해질 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자유롭다. 그간 거의 매일 집에서 가까운 바티칸 광장과 ‘천사의 성’ 주변을 산책했고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로마의 빛나는 명소 어디든 갈 수 있는 나다. 어제는 ‘천사의 성’ 곁을 흐르는 테레베 강을 따라 한 시간 가량 걷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투명하리만치 맑고 푸른 로마의 하늘 아래에서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답답’ 운운은 ‘꿈의 로마’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겐 호사스러운 말로 들릴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수박 겉핥기 식 ‘관광’은 말할 것도 없고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행’조차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러니까 관광 내지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의, 어디 가서 뭘 보았으며 어디 가니 뭐가 너무너무 좋더라는 식의 이야기엔 심드렁해지기가 일쑤다. 누군가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의 멋진 풍광을 칭송할라치면 나는 그예 삐딱한 대꾸를 하고 마는 것이다.  

        

“부산의 해운대 미포에서 송정에 이르는 해안길도 그에 못지않지요.”

      

이런 걸 두고 시쳇말로 ‘재수 없다’고 할지 몰라도 어쩌겠는가, 내 마음 나도 모른다고 해 두자. 몇 년 전 대구의 한 친구가 부산에 놀러 왔을 때의 일이다. 둘은 해운대 미포 바닷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부딪치며 낄낄거리다가 문득 한 가지에 의기투합을 하게 되었다.   

       

“야, 우리 꼭 쿠바는 한 번 가자!” 

“좋지. 하바나 바닷가 석양이 죽인다더구만.”   

   

쿠바 시절의 헤밍웨이, 그의 〈노인과 바다〉도 떠올렸었다. 그러고 우리는 해운대 백사장의 이쪽 끝인 미포에서 다른 한쪽 끝인 동백섬을 향해 걷기 시작했는데……때는 바야흐로 석양의 때, 붉은 해가 서쪽 하늘을, 굽이굽이 펼쳐진 서편 하늘의 구름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야아! 나부터 절로 탄성이 나왔다. 부산, 그것도 해운대구에서 30년을 넘게 산 나였지만 그날만큼 해운대의 석양이 아름답게 보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오,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도 영광 있으라!)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소리쳤었다. 

     

“야, 쿠바를 우리가 왜 가야 하나? 하바나 해변의 석양을 바로 여기서 보고 있는데?”     


물론 해운대는 해운대고 하바나는 하바나다. 내가 이번에 다시 보게 된 교황청, 성 베드로 대성당, 천사의 성, 콜로세움, 스페인 광장, 트레비 분수, ‘진실의 입’…, 이런 것들은 모두 세상에선 하나밖에 없는 진기한 무엇이고 이탈리아에 오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들이다.     

 

한데 나는 어제 테베레 강변을 거닐면서 부산 우리 집에서 좀 걸어 나가면 만날 수 있는, 잘 다듬어진 수영강변길을 떠올렸었다. 테베레 강상을 나는 갈매기들은 수영강에 떠있는 청둥오리 떼와 겹쳐졌고 바람도 수영강의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으며 어느샌가 나는 수영강변을 걷고 있었다……. 뒤따라오던 아내가 “여보, 저길 좀 봐요” 한마디를 던져 나를 로마로, 테베레 강변으로, 저만치 보이는 ‘천사의 성’으로 쏜살같이 돌아오게 만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건 환영(幻影)이야, 환영……! 상념 속의 수영강변이 아니라 바로 눈앞의 테레베 강 풍광이 그렇게 다가왔던 것이다.   

   

‘나는 과연 로마에 닿을 수 있을까?’    

 


고백하건대 이번 로마행을 앞두고서 내가 떠올린 하나의 화두가 이랬다. 화두라니 그건 그냥 바보 같은 소리일 뿐이야. 누군가 이렇게 핀잔을 준다 해도 달게 받겠다. 사실 그렇기도 할 테니까. 다만 내겐 그야말로 ‘진실의 입’과도 같은, 실재(진실)와 환영(거짓) 사이에서 흔들릴 때마다 그 입안에 손을 집어넣으면 실재에 직면토록 나를 각성시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는 건 말해 두고 싶다. 어린 시절 마르고 닳도록 읽었던 마테를링크의 《파랑새》 이야기가 그것이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자신의 아픈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와 달라는 요술 할머니의 청에 따라 집을 떠나 온갖 일을 다 겪는 것인데 마침내 집에 돌아와 보니 파랑새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더라는, 다 잘 아는 이야기다.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다. 멀리서 찾지 마라. 흔히들 말하는 이 이야기의 교훈이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파랑새 이야기는 뜻깊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가난을 벗어나 부자만 되면, 스무 평에서 마흔 평 아파트로만 가면, 좋은 대학만 가면, 대기업 취직만 되면, 우리 자식 결혼만 시켜놓으면, 여행을 마음껏 다닐 수만 있다면, 아프지만 않으면, 죽지만 않는다면……! 이런 식으로는 살지 말라는 가르침을 작가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놀라운 이야기로 녹여낸 것이다. 근데 그뿐일까? 파랑새 이야기를 그런 교훈의 울타리에만 가둬 놓아도 되는 것일까?   

   

파랑새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겹쳐 떠오르는 이야기도 한 번 해 보자. 불교 경전으로서 《화엄경》 하고도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등장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 이야기가 그것인데, 이 또한 다들 알만한 이야기다. 참된 구도자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에게 부처의 법을 묻는 것을 시작으로 구도 행각에 나선 것인데 52명의 선지식들을 두루 만난 후 마침내 다시 돌아온 곳은 바로 문수보살의 자리였다는 것. 온 산천을 헤매고 돌아다녀 봤자 결국은 다 부처님 손바닥 위였다는 것. 도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 파랑새는 늘 우리 곁에서 울고 노래하고 푸르르 날고 했지만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뿐이라는 것…..

      

나는 지금 어디 있는가. 로마에 있으면서도 도무지 로마에 닿지 못하고서 천지 사방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은 나는? 내일이라도 ‘진실의 입’을 찾아가 그 입에 손을 넣고는 ‘나는 로마에 있다’와 ‘나는 로마에 있지 않다’를 번갈아 말해 본다? 그러면 헤라클레스 신전과 연결된 하수구의 돌 뚜껑이었다고 하는 그놈의 입은 내가 뭐라고 할 때 내 손을 꽉 물을는지? 아니면 바다의 신이기도 한 그자는 그 부라린 사자 같은 눈으로 오히려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것 봐, 꼬레아노. 부탁하건대 내 입에다 손을 집어 넣지는 말아 주게. 내게 물을 거 뭐가 있나. 누가 뭐래도 그 손은 당신 손이고 또한 당신이고 로마든 어디든 지금 당신은 그냥 그렇게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로마에 있지만 꼭 로마에 있다고만 할 수 없으며 온전히 나지만 세계라는 바다의 물 한 방울이기도 한 나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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