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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Dec 02. 2019

섬진강 도보여행ㅡ추석을 걷다 (상)


그 해 추석은 연휴기간이 5일간으로 좀 길었다.  글은 2007년 9월 24.~ 9. 25.까지 이틀간의 기행문이다. 우리 가족들이 도보여행을 나서는 이유가 있었으니, 여기에는 아이들과 부딪히는 상황이 많아외부활동을 통해 이야기도 나눠고, 유약한 심신을 보자는 그럴듯한 목표가 숨어 있었다. 당시 아이들은 중학생이었다.




이미 계획을 세워둔 터라 죄스럽지만 서울의 부모님께는 한주일 미리 올라가 안부인사를 드리고, 추석명절에는 다시 못 올라올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래도 막상 연휴가 시작되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자꾸 앞선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해해주실 거라고 애써 위안하며 연휴가 시작되자, 시골에 있는 아이들 외가에 가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다음날부터 우리들은 1박 2일정(?)에 나섰다. 시작은 하동읍에서 구례읍까지 구십리(36km) 길, 19번 국도를 따라 섬진강을 왼쪽에 끼고 걸었다.



(첫날 / 9. 24)

08:00 기상! 기상!
기차 시간 늦으면 안 되니까 서두르자. 부산하게 준비물을 챙기고, 의장을 갖춘 후에 배낭을 메고 나서니, 기차 출발 시간이 15분 정도밖에 안 남았다.


“까딱하면 못 탈지도 모르겠는 걸”


택시를 타고 달리는 동안에도 안절부절... 다행히 3분 전에 순천역에 도착해서 예매한 표를 받아 개찰하고 자리를 잡고 앉으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차량은 4량 구성인데 순천에서 부전역(부산)까지 가는 열차이다. 승객도 듬성듬성 별로 없다. 전세 낸 기분으로 의자를 뒤로 제키일단은 느긋한 마음으로 창밖을 본다.



09:40 기차 타고 순천에서 하동으로
일기예보대로 창밖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태세인데, 도보여행을 떠나는 마음이 그다지 편안하지가 않다. 다음 기회로 미룰까도 몇 번이 가족들과 의논한 결과, 한번 결심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된다는 아내의 의견에 밀려서 결국 나서기는 했지만, 역시 무리가 아닐까?

음... 그래!! 2개월 전부터 그토록 벼르고 벼른 일이 아닌가. 중간에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되면 되돌아오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 보자. 차창밖 풍경이 조금씩 바뀌는가 싶더니 결국 빗줄기를 뿌린다.



10:10 하동읍 하차
어라, 빗줄기가 굵어진다. 어찌 됐거나 우산을 펼쳐 들고 하동역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장 찰깍!! 다들 우산을 들기는 했지만, 어제 휴대하기 편리한 삼중 우산 두 개를 샀는데 이게 또 말썽이다.


“음?이거 중국산이네. 새 것을 다시 사야겠다.


두 개가 다 바보다. 배낭에 집어넣고 다시 가게에 들어가서 새로 두 개를 구입했다. 그런데 몇 걸음 걷다 보니 아무래도 비는 계속 내릴 것 같고, 이 상태로 가면 얼마 못 가서 온몸을 적시리라 생각된다. 그래 비옷도 사 입자. 옷이 없으면 비닐이라도 뒤집어쓰던가.
하동읍내를 뒤져서 배낭은 비닐로 씌우고, 전투복 무늬의 비옷을 하나씩 걸치고 나니 이제 만반의 준비는 끝난 셈인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가야 하나 생각을 하면서도 군소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무언의 결정...



10:50 구례를 향하여
비 내리는 하동읍 뒤로하고 섬진강을 끼고 19번 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걷는다. 비옷 입고, 우산을 받쳐 들고, 배낭 둘러메고, 네 명이 한 줄로 터벅터벅 걸음을 내딛는다. 비 오는 날! 100리 길을 걷는다는 게 웃기기도 하고, 재미있을 것도 같고. 하지만 학교 다닐 때 기껏해야 20여 리 길 정도만 걸어봤던 감각이 다소 걱정도 된다.



12:00 과일창고 앞에서 휴식
비가 계속 내리고 차량 통행도 많아서 걸음이 더디고 무겁다. 5km쯤 왔을까. 배가 약간 출출하여 떡 한 조각씩 떼어 먹으며, 30분 정도 쉬면서 도로 통행 시의 주의사항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출발!




13:30 배밭 할머니
지난해 차를 몰고 지나가다가 들렸던 할머니네 하동 배밭에 들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배를 팔려고 길가 배밭 옆에 지어놓은 막사에 들어가 우리 가족을 알아봐 주시는 할머니가 공짜로 깎아주시는 배를 먹으면서 기력 회복... 올해는 비가 많이 내려서 당도가 떨어졌다고 아쉬워하신다. 차조심해서 가라는 말씀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14:30 구름 속에 담긴 산하
우리는 빗물에 반사된 앞사람의 그림자를 밟으며 걷는다. 다들 말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저 멀리 광양 쪽의 산자락에 걸린 구름이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한다. 산 중턱이 가려지고 봉우리만 살짝 드러난 게 가히 환상적이다. 강은 그동안 여러 차례 내린 비로 평소보다 수량이 많이 불어나 있다.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가로수길...
그리고 산, 강, 황금들, 과일밭, 차밭, 채전 등등 먹거리 풍부한 식당가가 계속 이어진다. 이제 출발지로부터 10km 지점이다. 혼자서 걷는 걸음이라면 1km를 보통 10분 정도 걸릴 거라고 계산해보지만 오늘은 굳이 따지지 않고 여유 부리면서 걷는다.



16:30 비 개인 오후
비가 그치자, 비옷이 무겁게 느껴져 다들 비옷을 벗어서 배낭에 묶었다. 걷다가 쉬다가를 거듭하다가 중간에 청국장집에 들러 늦었지만, 그래서 더욱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일행은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다. 배도 고픈데, 다리도 아프고 30분 이상을 쉬었나 보다. 이제 6km 정도만 가면 화개장터다.



17:30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19번 국도와 섬진강 둑방길이 갈라지는 길이 나타나자, 갑자기 애들의 환호성이 하늘을 찌른다.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연히(?) 둑방길을 택했다. 1km쯤 됨직한 둑길 양편에는 흰색, 파랑, 분홍, 심지어는 검붉은 색코스모스가 만개했다. 코스모스 뒤로는 여전히 섬진강이 내려다보인다. 싱그러운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며 우리들은 천천히 길을 따라간다.




18:00 화개장터 다리를 바라보며
오늘의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가 2~3km쯤 남았을까. 오늘 코스는 대략 19km 정도가 되리라. 이제 거의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걸음을 더 늦추고 산, 강, 들을 바라본다. 처음 여행을 기획했을 때만 해도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아이들의 심신을 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는데, 걷는 동안 생각을 바었다.
도로 여건상 나란히 대화하며 걷기가 어렵기도 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사람과 사람과의 대화보다 자연과의 대화에 충실하고자 했다. 함께 하는 여행이지만 사실은 혼자만의 시간일 수도 있었다. 학교와 직장, 그리고 가정에서 느끼고 부대낀 시간을 잠시라도 잊어버리고,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다면 백 마디 언어보다 하나의 자연현상에서 얻어지는 느낌이 어쩌면 더 클 수도 있으리라. 아니 생각조차도 잊고 걸었다. 걸으면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19:00 화개장터 도착
장터에 들어서니, 추석 전야제가 시작되고 있다. 외지에 나갔던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자랑을 펼칠 셈인가 보다. 돼지고기 수육에 막걸리와 소주, 지나가는 나그네에 대한 배려도 있다. 막걸리 두어 사발에 김치 고기를 두어 점 들고 보니, 여독이 싹 가시는 기분이다. 발바닥에 물집이 여러 개 잡혀서 걷기가 불편해도 이번 여행은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자랑에는 작은애를 우리 가족 대표로 내보내서 작은 선물(불고기 구이용 프라이팬)도 하나 건졌다.
한 시간 정도 어울리다가 쌍계사로 이어지는 도로변 숙소를 잡아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다시 밖에 나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에 들어와 내일 일정을 다시 한번 점검. 물집 잡힌 발바닥에 실을 어 놓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도 이미 밤 11시를 지나고 있다. 내일은 17km니까,  오늘보다는 조금 수월하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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