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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Dec 02. 2019

섬진강 도보여행, 추석을 걷다 (하)



09:30 늦은 기상
도보여행 이틀째의 날(9.25일)이 밝았다. 추석 당일이다. 일어나 보니 벌써 9시 30분. 다들 늘어지게 잘 잔 것 간다. 이런 날 도보 여행한답시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오늘도 걷기로 결심한 목표, 남은 여정을 기 위하여 마음을 다잡고 나선다. 물집 잡힌 부분도 실을 꿰어놓은 덕분에 한결 가벼워졌다.



10:00 화개장터를 뒤로 하고
대략 배낭을 챙겨 메고 나서니, 벌써 10시다. 쌍계사를 들렀다 가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1km 정도라면 들려 볼까 하고 거리를 물어봤더니, 웬걸 5km 정도란다. 그렇다면 왕복 10km... 평소 차로만 다니던 감각이 무색해진다. 할 수 없이 아침식사는 걷다가 적당한 식당이 나타나면 하기로 하고 일단 출발하였다. 5분쯤 걷다가 어제 하동 쪽 도로귀성 차량통행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며,
섬진강을 끼고 광양 쪽 도로를  따라서 구례에 가는 것과 그냥 하동 쪽에서 구례까지 길 중에 어느 길이 좋은 지를 화개시장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섬진강을 끼고 하동 쪽에서 곧장 올라가는 게 낫단다.



11:00 차례상 대접
어제는 비가 와서 우산을 받쳤는데, 오늘은 따가운 햇볕이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우산을 양산 삼아 받치고 한 시간쯤 걸었을까. 드문드문 성묘객들이 길가에 정차해 둔 차량들이 하나둘씩 서있다. 어제 내린 비가 산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물줄기에 젖은 곳도 더러 있다.
한참을 걷노라니 배가 슬슬 촐촐해진다. 식당이 몇 집 늘어선 곳이 나타났다. 그중 괜찮은 차림표가 걸려있는 식당에 가보니, 이 식당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어떤 한식당으로 들어갔다. 7~8명의 식당 가족들이 차례를 지내고 식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식사가 되는지 물어봤더니 자리에 앉으란다.
20여분쯤 기다렸을까? 식당 주인이 차례상을 물리고 주섬주섬 챙겨 오는 식단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주문한 메뉴 이상의 반찬이며, 먹을거리가 올라온다. 아침을 아직 먹지 않고 행군한 탓인지 다들 정신없이 먹고 마시고, 아무튼 특별한 추석 이바지를 받은 느낌이다.


길가에 떨어진 밤도 줍고 화초에 잠시 한눈도 팔고, 어느 마을 입구에는 노래자랑대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12:30 구례군에 접어들다.
진수성찬의 차례상을 물리치고 뚜벅뚜벅 갈 길을 재촉하여 걷노라니, 길가에 승용차를 세워두고 산속에서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군데군데 있다. 가만히 동태를 지켜보니 성묘객들의 차량인 듯하다. 어제보다 더 많은 귀성 차량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기온은 더 상승하여 구슬땀이 배인다. 어제는 비가 내려서 비옷 입고 우산 받치고 불편했는데, 오늘은 우산을 양산 삼아 걷노라니 이것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겉옷도 하나씩 벗어서 배낭 멜빵에 묶고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다. 이정표는 구례까지의 거리가 아직 10km를 부지런히 가야 한단다.



14:00 밤을 주워 담고
한참을 걷다 보니 알밤들이 제대로 영글었는지, 밤송이 사이로 터져 나온 놈, 도로 위에 떨어져 널려있는 놈... 토실토실하게 잘 여문 알밤들이 보기에도 옹골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낭에 주워 담기 10여 분만에 배낭 주머니에 꽉 찬다.
잘 생긴 놈 하나를 집어 이빨로 껍질을 벗겨내고, 와삭와삭 씹어 먹으며 애들한테 한마디 던졌다. 예전에 군것질할 게 별로 없던 시절에는 참 맛있게 생밤, 군밤을 먹었었노라고. 하긴, 어디 밤뿐이랴. 보리 서리, 수박, 복숭아, 고구마, 감자, 개구리 구이 등등 이것들이 더없이 좋은 간식거리였다. 하굣길에는 길가에 있는 무 하나씩 뽑아 들고 훌렁훌렁 껍질을 벗겨 우걱우걱~ 먹는 맛을 너희들이 알랴.



15:00 동네방네 노래자랑 소리를 들으며
길을 걷노라니 때가 때인지라, 마을마다 객지에 나갔던 동향인들의 귀성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세월 좋은 노래자랑이 펼쳐진다. 작은 고개를 한 바퀴 돌아서니, 멀리 구례읍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야!! 드디어 목적지가 보인다. 모두들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는 듯 환호성을 내지른다.



15:30 눈에 보인다고 가까운 게 아니다.
걷고... 또 걸어도, 읍내까지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 않는다. 다들 지친 몸이라서 그런지 몸이 무겁다. 도중에 정류소로 보이는 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우산을 접고, 신발도 벗어버리고, 다들 보도 위에 퍼질러지듯 주저앉았다. 아무도 없는 시골 정류소의 콘크리트 울타리가 외롭게 서서 길가는 나그네를 내려다보는 듯하다. 20분 정도 쉬었을까?


이번 여행에 큰애는 참 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묵묵히 잘 참아줬다. 녀석은 처음 순천으로 이사와 광양읍내 중학교를 1년간 다녔는데, 집에 올 때 아침에 차비받는 것을 깜박 잊고 교통비가 없어서 5시간을 걸어서 집에 온 경험, 예술회관에 연극 보러 갔다가 요령 없이 집에까지 몇 시간인가를 걸어온 악몽을 갖고 있다. 그런 경험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너를 강하게 만들었구나 싶은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절로 목이 메어온다. 가족들과 같이 걷는 게 즐겁다고 오히려 너스레를 다 떤다.



평소에 잘 참고 잘 어울리는 작은애가 오히려 지치고 힘들어하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하소연을 연발한다. 마지막 기운을 차리고 일어서자니, 아닌 게 아니라 온몸이 천근만근이나 되는 듯한 느낌이다. 발바닥이 불에 덴 듯 뜨겁고 무겁다. 이틀간 걸은 게 불과 36km인데, 이렇게 힘든 일인가. 익숙하지 않은 탓이려니...



섬진강을 따라 수없이 자동차로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인적 없는 초가가 강변에 숨어 있는데, 세월의 무상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16:00 구례읍에 들어서다.
구례읍내에 들어서니, 아무튼 해냈다는 자긍심에 모두들 충만하데, 작은애 힘이 하나도 없다.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순천시내 들어가는 버스를 타려고 버스터미널을 물어물어 도착했을 때, 곧 떠나려는 버스가 있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 가지고 서둘러 버스에 오르니 다들 녹초가 되었지만, 어쨌거나 목표를 달성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길게 내쉬며, 문명의 이기를 감사해 마지않는다.



구례읍에서 순천까지가 30km쯤 될까? 이 거리보다 조금 더 걸은 셈이다. 버스30분이면 족할 거리를 이틀에 걸쳐 걸은 걸 생각하니 새삼 옛사람들의 노고가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아무튼 순천 버스터미널에 내려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는 것으로 이번 도보여행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터미널에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집안에 들어서니 오후 6시다. 왜 이런 힘든 여행을 굳이 해야 하는가 하고, 작은애가 몇 번이나 불평하며 물어왔다. 그때 나는 10년쯤 지나면 자연히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작은애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며 다시는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그래 10년 후, 우리 가족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때 우리들은 이 여행을 각자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느끼고 있을 것인가? 굳이 부모로서 바라는 게 있다면 심정으로 이 여행을 통하여 지금은 보이지도 않고 측정할 수도 없지만, 훗날 정신적으로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작은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걷지 않으면 볼 수 없었던 것들이 있듯이 지금 말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작은 추억 하나가 추가되어 기억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노라고...
수고했어. 아들, 딸아! 그리고 O 여사!   (끝)



강둑에 매어둔 흑염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도보여행 후) 

시간이 조금 흘러 대학생이 된 작은애는 그토록 싫다던 그 길에 대한 다시 한번 걸었다. 유럽여행을 가려면 걷는 연습이 꼭 필요하다는 엄마의 말에 여행 갈 욕심으로 두 번째 도보여행은 엄마와 둘이서 나선 것이다. 화개장터에서 하루 쉬었는데, 구례에서 하동으로 반대 방향에서 걸었다. 그리고 모녀는 한 달 가까이 유럽과 친해지고 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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