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버티지 못했을까. 지금도 그때도 난 너무 어리고 어렸다.
글을 여러 편 읽어보다 발견한 사실 한 가지. 단 한편의 와 닿는 글이 있다면 난 그 작가의 구독자가 된다. 단 한편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나머지 10편이 별로더라도 같은 글을 수백 번도 더 읽을 수 있다. 첫눈에 마음을 사로잡혔기에 나머지 글도 기대하게 된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멋지고 화려하지 않아도 투박하고 소박해도 단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울릴 수 있다면 그것보다 멋진 일이 없을 것 같다. 왜냐면 내가 그랬으니깐.
한편의 글에 받은 감동이 일상에 활력을 주고 순간에 기쁨이 된다는 것을 나는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글 읽는 기쁨. 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사실 난 책을 읽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책을 사랑했던 엄마를 따라 어릴 때부터 수없이 많은 책을 읽었다. 세계명작어린이전집, 과학서적, 소설책 등 한 번만 읽은 게 아니라 재밌는 책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중학교 때 수학 과외를 했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한창 재밌게 읽다가 주인공이 세계일주를 마치고 제 시간 안에 돌아올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굉장히 긴장되는 장면에서 선생님이 오셨다. 너무 아쉽게도-아니 한편으로는 이 재밌는 책을 한 번에 다 읽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하는 생각으로-책을 가지런히 덮어두었고 과외시간 한 시간 내내 다음 주 드라마 주인공의 키스신을 기다리는 것 마냥 설렜던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결국 주인공은 사람들의 야유와 부정적인 시선 속에서 일주를 멋지게 마치고 제시간에 돌아왔으며 나 역시 졸이던 심장을 한편에 내려두고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었다.
밤에는 책 읽다가 잠드는 게 일상이었다. 책을 읽으며 잠을 청하면 책 속에 잠드는 기분이 들어 행복했다.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책을 좋아하고 책 읽는 즐거움을 알며 소설가가 꿈이었던 나는 20살, 부푼 꿈을 안고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실상은 많이 달랐다. 솔직히 말해 너무 어려웠다. 교수님의 강의는 전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동기들은 내 말에 공감하면서도 수업이 끝날 때마다 엄지를 치켜들며 박수를 쳤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이 교수님의 단상 위엔 항상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난 교수님의 입맛에 맞는 답변을 써내야 했고 친구들의 어려운 표현에 다시 어려운 말로 품평을 해야 했다. 쉬운 글, 잘 읽히는 글을 좋아했던 내게 내가 느낀 나의 전공은 이랬고 난 점점 책과 글쓰기에 흥미를 잃어갔다.
난 학교 강의에서 눈을 돌려 학회를 들었다. 시를 쓰는 학회였는데 토요일 문학을 논하며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선배들의 회색 담배연기 자욱한 1204 강의실과 그 안에서 어려운 제목의 책을 읽어나가는 내가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처음 내 시를 써간 날 '이건 시가 아니야. 밖에 나가서 길가는 사람들한테 다 보여줘도 이건 절대 아냐'라는 한 선배의 말에 '그럼 시가 도대체 뭔데?'라는 내 속마음이 혀 끝까지 튀어나왔지만 대선배님들 앞에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선배들은 '너넨 아무것도 아냐.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들 시는 눈 앞에서 칼로 갈기갈기 찢겨 버려졌어'라는 말을 무용담처럼 쏟아냈고 그 뒤로 난 침묵 했다. 나름 고등학교 시화전 출품에 당선됐던 시였는데. 아무래도 수정을 좀 했어야 했나 보다.
난 이듬해 다른 과로 전과를 했다. 전과 후 바쁘다는 이유로 매일 쓰던 일기도, 과제 때문에 억지로 써냈던 글도 더 이상 쓸 일이 없었다. 현재는 다른 전공으로 졸업했지만 사실 내 5년을 돌이켜보았을 때 1학년 때만큼 추억 서린 기억은 없다.
왜 버티지 못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난 너무 어렸다. 어렵다고 피한 건 아닐까. 계속 남아있었다면 현재 글 쓰는 직업을 가졌을까?
다시 글을 쓰고 싶을 때마다 그 1년의 기억을 되살려 끄적여보곤 했지만 철없는 어휘와 문장으로는 나 자신이 원하는 글조차 써 내려가기 힘들었다.
요즘따라 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쓰는 게 아니라 더 잘 쓰고 싶다는 욕심도 부린다. 많이 쓰고 무엇보다 많이 읽어야 하지만 마음에선 여유가 없다는 핑계를 자꾸만 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