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이 통하지 않을 때

그리고 할 말 없을 때(※스포 주의)

by sewon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한순간에 와장창 무너져 버리고 자존감은 한 계단 내려앉은 그런 날이 있었다.



나름 :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방식. 또는 그 자체.

- 나는 내 나름대로 일을 하겠다.

-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세상을 살기 마련이다.



국어사전 예시조차 자신의 방식대로 살겠다고, 그리고 알겠다고 하는데 내가 이 예문에 질투를 느끼는 날이 오다니.


자소서를 나름대로 열심히 썼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떨어지고, 나름대로 공부하고 시험도 치고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부모님께 인정받지 못할 때 자존감은 한없이 가라앉는다. 누구나 이 시기엔 그렇다고, 원래 그런 거라고 친구들도 스스로도 다그쳐보지만 별 위로가 되지 않는 건 사실이고 어쩔 수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방식으로 살기엔 부모님의 나름, 사회가 요구하는 나름과의 차이가 너무 크다. 내가 모자란 걸까, 단지 맞지 않는 걸까라는 고민도 든다.



얼마 전 반세기나 지났지만 여전히 명작으로 손꼽히는 영화 <메리포핀스>를 봤다. 내가 메리포핀스를 맨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때 엄마가 사주신 청소년용 세계명작 전집에서였다. 책을 한번 읽으면 금세 내용을 잊는 내가 줄거리에 대한 기억을 가장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책이다. 그만큼 재밌게 읽었다는 거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들과 책이 마지막에 접어들 때의 그 엄청난 아쉬움까지 - 마치 메리포핀스가 뱅크스 남매에게서 떠나듯 내게서도 영영 떠나는 기분이 들어 하루 종일 울적했다 - 메리포핀스는 그만큼 내게 애정 가득한 인물이었다.



보고 싶었던 유모 메리포핀스를 영화에서 다시 만나니 반가운 마음에 (사실 어린 시절도 좀 생각나고 향수에 젖어서) 울컥했다. 중국어시험 바로 하루 전날 감상했지만 후회는 없다(시험 기간엔 뭐든 재밌다).



추억에 푹 빠져 감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커버려서 그런지 어릴 때 읽었던 그림 속 여행, 동물과 이야기하기, 웃으면 몸이 천장까지 붕 뜨는 아저씨 보다도 나를 사로잡은 이야기는 Mr. 뱅크스 씨의 삶이었다.


▲영화 <세이빙 MR. 뱅크스>. 메리포핀스와 함께 감상하면 좋다.

뱅크스 남매의 아버지 Mr. 뱅크스는 나름대로 성공한 은행가이다. 삶을 초단위로 살아가며 비록 다정하진 못했지만 아이들에게 질서와 엄격으로 가르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유모 메리포핀스를 만나며 그의 인생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가던 그에게 해고의 위기가 찾아오고 '더 할 말 있냐'는 은행장의 물음에 메리포핀스의 가르침을 외친다!


" 할 말 없을 때 하는 말이 있죠. 슈퍼칼리프레글리스틱엑스피알리도셔스! "


정확하게 동그랗던 Mr. 뱅크스 씨의 삶이 모나는 순간이었다. 거의 미친것 같이 슈퍼칼리프레글리스틱!을 계속해서 외쳐댔지만 이후의 결과들로 꼭 동그라미가 정답은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메리포핀스와 이 이야기가 얼마나 관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동그랗던 나름의 순간들이 매 순간 깨지는 것을 보면서 참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들 각자의 방식에 나를 끼워맞추다보니 내가 사라지는 기분도 들지만 이 또한 배움이라고 생각하련다(올해의 목표 -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성공한 사람들의 기사 인터뷰 중 간혹 '남들이 뭐라 해도 나는 내 길을 갔어요'라는 구절이 보인다. 부럽기도 하고 동시에 '나도 누가 뭐라든 내 길을 가야 하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아직 내 길이 뭔지 조차 잘 모르는걸. 그러니깐 여러 방식에 뛰어들다 보면 나와 맞는지 맞지 않는지 알 수 있겠지. 지금 난 그 과정의 한 복판에서 쓰라린 상처를 받고 생채기를 내며 열심히 (안 맞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혹은 누가 내게 던진 한마디 말에 자존감이 떨어지고 할 말 없을 땐, 나도 이제 이렇게 외치기로 했다. 슈퍼칼리플레글리스틱엑스피알리도셔스.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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