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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고모는 60년 전 파독 간호사였다.

by 베존더스

독일에 20대 때 파독 간호사로 온 시고모는 한국에서보다 독일에서 살아온 날이 많다. 생각하는 것도 독일인이다. 7월 첫째 주 오페라 극장에서 일하는 남편의 시즌 마지막 공연이라 보러 오셨다. 무뚝뚝하던 시아버지 표정이 밝았다. 공연 보고 하루만 주무시고 가시는 고모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8월에 고모 손녀의 결혼식이 있다. 마침 한국에서 시부모님도 오셨으니 7월 중순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 차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사시는 고모를 시아버지는 한사코 모셔다 드리려 했다. 독일인 시고모는 뿌리치며 혼자 기차 타고 가셨다.


7월 중순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5년 만에 만난 남편의 사촌 누나네는 낯설었다. 남편과 결혼한 후 딱 한 번 만났다. 사촌 누나를 처음 만난 건 우리가 결혼하고서였다. 시고모에게 인사드리러 간 자리에서 만난 사촌 누나는 살갑게 인사하는 나를 차갑게 바라봤다. 따뜻함 보다는 얼음같이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런 누나가 15년의 세월 동안 차가움은 녹아지고 선한 사람이 되었다. 딸의 결혼을 앞두고 심경이 어떨지. “잘 지냈어요?”라는 형시적인 인사로 시작했지만 이야기할수록 측은함이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사촌 형 네가 왔다. 1년에 한 번 만나온 형네는 친근했다.


반가움에 한달음에 달려가 안으며 인사했다. 형님은 삼 남매 선물을 준비해 왔다. 나 역시 조카 선물을 가져갔었다. 1년 만에 만난 조카는 부끄러워서 몸을 비비 꼬았다. 시간이 필요했다. 소란한 가운데 주인공 예비부부가 나타났다. 15년 전 꼬꼬마는 어엿한 숙녀가 됐다. 어린 시절 딱 한 번 본 나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난 또렷이 기억했다. 시고모에게 보여드린다며 가져간 결혼식 동영상을 내 무릎에 앉아서 누구냐며 연신 물어보던 작은 아이. 똘똘한 눈망울이 아직도 선한데 벌써 결혼이라니. 나는 예비 신부가 된 그 아이를 꼭 안아줬다. “결혼 축하해!”


한자리에 다 모이고 시고모와, 사촌 누나가 준비한 다과를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일에서 수년을 살아온 이들 앞에서 독일어로 대화하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나마 편한 형님 옆으로 파고들며 의지했다. 형님은 나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산책하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니 조카는 우리 집 삼 남매와 어우러졌다. 조카와 서 있는 '다운천사' 딸은 여전히 아가였다. 조카가 딸을 끌어주고 밀어주며 챙겨주는 모습은 영락없는 언니의 모습이었다. 외동인 조카는 북적이는 삼 남매를 좋아했다. 가까이 살면 더 자주 만났을 텐데.


저녁 시간이 되어 예약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중 남편은 정신없어 보였다. 반은 한국, 반은 독일이지만 독일어만 쓰며 자라난 사촌 누나, 형은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남편은 시부모님의 동시통역사였다. 긴 시간 통역 하다 보니 혼란이 온 남편은 시부모님께 독일어로 사촌 형에게 한국어로 전달했다. 서로가 갸우뚱한 표정을 보고서야 남편은 사태 파악했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지 연신 물을 마셨다.


만난 지 8시간 만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언제 또다시 만날지 모르는 시고모를 안고는 놓지 못하는 시아버지, 눈시울이 벌게진 시고모를 보니 나도 울컥했다. 하나뿐인 피붙이가 독일과 한국에 떨어져 사니 그 그리움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15년 만에 만나 어색할 것 같았던 사촌 누나네와 만남은 마음 한 편의 따뜻함으로 남았다. 사촌 형네와는 내년을 기약했다. 사랑이 넘치는 다운천사는 식구들 한 명 한 명 작은 팔로 꼭 안으며 인사를 나눴다. 모두가 함께 했던 소란함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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