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과 여행을 떠났다. 독일에서 출발해 프랑스와 스위스로 가는 자동차 여행. 변성기로 목소리가 걸걸한 첫째 듬직이, 예민한 둘째 테디베어, 호기심 가득한 사고뭉치 막내 다운천사와 장거리 여행은 쉽지 않았다. 지극히 한국적인 시부모님과 독일에서 자유롭게 자란 삼 남매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그 사이에서 난 살얼음 판을 걷는 것 같았다.
사춘기 소년의 마음에 어른과 여행하고 싶었겠는가. 부모님과 여행에도 힘든 나이인데. 할아버지는 큰손자가 잘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첫째는 할아버지의 잔소리에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결국 눈물을 쏟았다. 잘 성장했으면 하는 말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첫째 듬직이에게는 버거웠다. 내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듬직이의 등을 토닥여주는 것뿐이었다. 식사 때마다 예절을 가르치는 할아버지로 눈치 보며 제대로 먹지 못하는 둘째 테디베어도 안쓰러웠다. 아버님은 인지가 부족해서 차를 조심하지 않는 다운천사에게 조차 호통치셨다. 삼 남매를 위한 아버님을 이해하지만 조금은 아이들 마음을 보듬어 주며 가르쳐 주셨으면.
조용히 사시던 두 분이 맞닥뜨려야 했을 삼 남매의 소란함이 피곤하셨을 거다. 몇 년에 한 번 쑥 커있는 손자, 손녀를 만나니 이해하기 어려우셨을 거다. 부모의 훈계만 받던 삼 남매가 엄한 할아버지로 힘들었을 거다. 서로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행 후 남은 2주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아버님이 인내해 준 덕분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7월 말이 되었다. Frankfurt (프랑크푸르트) 공항까지 배웅해 드렸다. 두 분은 언제나 그리운 아들 얼굴을 보고 또 보며 눈에 담았다. 며느리에게는 “그동안 수고 많았다.”며 토닥여 주었다. 삼 남매는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두 분이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더 잘해드릴 걸 하는 후회로 눈물이 고였다. 흐릿하게 보이는 두 분을 한참 서서 바라봤다. 두 분 마음의 기억 장치에는 좋은 것들만 기억되길. 시부모님이 독일로 오시는 날 그러했던 것처럼 우린 어둑어둑해서야 집에 도착했다. 거실에 불을 켜는데 시부모님이 한 달 계시면서 채워주신 가전제품, 카펫이 우리를 포근히 맞아주었다. 사실 공사도 끝나지 않은 집에 시부모님 방문이 부담이었다. 부담스러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채워졌다. 한 달이란 시간 우리가 드린 것보다 받은 게 많았다.
이사하고 쉼표 없이 달려온 2개월이지만 사실상 집 짓는 것까지 해서 1년 2개월이란 시간을 오롯이 쉬지 못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쉬었다. 남편은 소파에 앉아서 졸고 침대에 기대어 자기를 반복했다. 내가 하는 밥이 아닌 친정엄마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었다. 아직 여독이 덜 풀린 남편에게 친정집에 가자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남편 주위를 맴돌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삼 남매도 외가댁에 가고 싶은 눈빛을 아빠에게 발산했다. 남편은 흔쾌히 응해주었고 친정이 있는 브레멘으로 떠났다.
3시간 걸려 도착한 친정집. 버선발로 나와 맞아주는 친정 아빠. 부엌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친정 엄마 음식 냄새. 보상이라도 받듯 소파에 몸을 푹 심고 두 다리를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