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넷은 싱그러웠던 20대에 만나 검버섯이 생긴 40대 중반의 아줌마, 아저씨가 되었다. 우린 독일 학생들 사이에서 만나게 된 한국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연애를 지켜보며 결혼을 축하해 주었고, 주니어를 한 명 한 명 낳으며 육아 동지가 되었다. 독일에서 외국인인 우린 서로에게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에서 올 수 없는 식구들을 대신해서 아이들 돌잔치에도 함께 했다. 그러던 중 나와 남편은 직장으로 인해 다른 주로 떠나게 되었다. 3년 후 그들도 두 딸을 데리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가족 같은 사람들이었기에 마음에 큰 구멍이 생겼다. 몇 년이 되었든 독일로 다시 돌아온다던 그들은 6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차로 5시간 떨어져 살았지만 한국보다는 가까웠다. 같은 독일 땅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아이들 방학 때면 만나려 계획을 세웠지만 주가 다르다 보니 방학 날짜도 달랐다. 이번 가을 방학은 한주가 겹쳤다. 꼭 만나자며 다짐했다. 한국 식당을 운영하는 그들은 큰맘 먹고 3박 4일 휴가를 냈다. 네 식구가 오면 편히 묵을 수 있게 쓸고 닦으며 방을 정리했다. 5시간의 장거리도 힘든데 도로 공사로 3시간이 더 지연되어
8시간 만에 왔다. 두 딸은 녹초가 되어 흐느적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제일 먼저 ’ 다운천사‘ 딸이 버선발로 마중 나갔다. 오빠들 틈에 자라던 딸은 두 언니를 보자마자 좋아서 와락 껴안았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아이들은 어색했다. 쭈뼛쭈뼛 비비 꼬던 녀석들은 금방 친해졌다. 서먹서먹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밤 11시까지 깔깔거렸다. 어른들 또한 회포를 푸느라 몇 분 몇 초가 아까웠다. 밤 12시가 되어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아이들은 새벽 6시에 일어났다.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차로 45분 가면 있는 네덜란드 놀이동산을 간다는 사실에 아이들을 설레게 했다. 엄마, 아빠 들은 피곤함에 짓눌려 몸이 깨는데 까지 시간이 걸렸다. 놀이동산 문 여는 시간을 맞춰서 도착하기 위해 애써 부지런히 움직였다. 우리 집 삼 남매는 이미 3번이나 갔던 곳이었지만 또래와 같이 가니 감회가 새로웠다.
놀이동산에 도착해서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무서운 놀이 기구를 탔다. 목청껏 소리도 질렀다. 체력이 좋은 큰 애들은 아빠들이 맡았다. 작은 애들은 엄마가 맡아 쉬엄쉬엄 놀이동산을 돌아다녔다. 엄마들의 이야기꽃은 질 줄 몰랐다. 말을 많이 해서 목이 따가웠지만 물을 마시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지칠 줄 몰랐다. 부대끼며 지낸 3박 4일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독일에 살며 한국말로 또래와 떠들고 놀았던 시간이 좋았던 아이들은 헤어지는 인사가 길었다. 서로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며 12월 겨울 방학을 기약했다.
네 식구가 빠져나간 자리는 컸다. 머물고 간 방을 정리하며 청소기를 돌리는 데 마음이 시렸다. 누가 며칠 씩 왔다가도 떠나면 아쉬움 보다 후련했다. 이번은 달랐다. 첫째 듬직이는 마음이 휑 하다며 담요를 뒤집어썼다. 둘째 테디베어는 집이 조용하다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다음 날이 되어 ‘다운천사’는 언니, 이모를 부르며 머물던 방문을 두들겼다. 인기척 없는 방문을 열며 엉엉 울었다. 작은 몸을 감싸 안으며 여린 마음을 달래주었다.
며칠이 지나면 허전함도 사그라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