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건조기에서 막 말라진 빨래를 꺼냈다. 창문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등으로 내리쬐는 햇볕이 따뜻했다. ‘요게벳의 노래’ 찬양을 틀어 놓고 빨래 개기를 시작했다. 찬양은 잔잔하게 집안에 울려 퍼졌다. 다희는 어느새 인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요게벳의 노래’는 다운 천사 다희를 낳고 많이 듣던 찬양이다. 당시 나는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힘들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올 때면 장를 보러 간다며 나왔다. 아이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차 안에 앉아 ‘요게벳의 노래’를 들으며 목 놓아 울었다. 그러고 나면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씩씩할 수 있었다. ‘요게벳의 노래’는 내 고백 같았다.
작은 갈대 상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
어떤 맘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마를 보고 있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흔들 흘러 내려가는 그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그가 널 구원하시리 그가 널 이끄시리라
그가 널 사용하시리 그가 너를 인도하시리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어떤 맘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흐르고 흘러
다희가 아가 때부터 많이 듣던 익숙한 찬양. 다희는 리듬에 맞춰 발을 오른쪽, 왼쪽으로 왔다 갔다 한다. 양팔은 날개 짓 하며 환한 미소로 한 바퀴를 또르르 돈다. 분명 평소와 다를 게 없던 일상이었는데 유독 이날은 다른 느낌이었다. 춤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다희 모습에 전율이 흘렀다. 앞에 놓인 빨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흐려졌다. 슬퍼서가 아니라 감사해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다희는 항상 기뻤다. 그동안 그조차 난 깨닫지 못했다. 난 그저 다희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사실에만 매여 있었다. 물 흐르듯 고요하다가도 한 번씩 내 마음에 소용돌이가 쳤다. 그럴 때면 눈물이 금방 차올랐다. 다희의 다름만 바라보느라 내 마음은 작았었다. 작아진 마음만큼이나 시야도 좁았다. 넓게 보지 못하는 난 작은 일에도 금방 좌절하고 자주 눈물짓던 걸 깨달았다. 남편과의 작은 마찰에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던 모습이 떠올랐다. 두 아들로 인해 속상하면 분을 참지 못했던 내 모습까지도.
다희가 춤을 췄던 그날 이후부터 내 삶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내가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감사했다. 극성맞은 두 아들은 더 이상 나를 속상하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두 아들 자체가 ‘감사’다. 개구쟁이 둘째 아들의 빵구난 바지를 보며 감사했다. ‘얼마나 신나게 뒹굴며 놀았을까.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정리하는 다희를 보며 감사했다. 어느새 훌쩍 커서는 자기 신발을 정리하는가 싶어 마음이 뭉클했다. 심지어 두 오빠가 여기저기 벗어놓은 신발까지도 다희는 정리한다. 앞으로도 울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겠지만 전보다는 일찍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 힘은 바로 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