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day. 안규철 작가와 만나다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갑자기 끊기고 낯선 정적이 흐르는 순간을 독일어나 불어에서는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의 글들은 내 안에서 천사가 지나간 시간들의 기록이다. 하루 종일 혼자 작업실에 머물며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 속에서 지내지만, 혼자 있어도 대화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림을 그리거나 나무를 다듬는 동안 재료들과 대화하고 머리와 손이 대화하고 왼손과 오른손이 대화한다.
이 말없는 대화가 어느 순간 끊기고 정적의 시간이 찾아올 때, 내 안에서 천사가 지나갈 때, 사물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들을 따라가는 짧은 산책 속에서, 무심히 지나쳐왔던 풀과 벌레와 나무들을 만나고, 우리가 만들었지만 알지 못하는 사물의 뒷모습들을 만난다. 정처 없는 이 여정은 끝이 없지만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이 길들은 어딘가에서 서로 만날 것이다. 짧은 한 순간일 수도 있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이 시간,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만이 내게는 예술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시간이다.
(프롤로그 中)
사물의 뒷모습. 안규철. 현대문학. 2021.
한 번쯤 만나고 싶다고 오래 생각해 온 사람들 가운데, 안규철 작가는 늘 열 손가락 안에 있었다. 그의 미술작품과 글은 표면보다 뒷면에 깃든 이야기를 더 오래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져 있다. 그의 책『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을 통로로 마침내 동료들과 그를 실제로 만날 기회를 얻었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은 '파울첼란'의 시 <그대도 말하라>의 일부에서 차용된 제목이다. '그대도 말하라, 마지막 사람으로 너를 말하라. 예와 아니오를 가르지 말라. 그 말에 방향을 주어라. 그림자를 주어라'는 시구다.
그의 책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적은 수의 책이 오히려 깊은 사유의 밀도를 증명하는 듯하다.
『사물의 뒷모습』,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안규철의 질문들』외 번역서까지, 그의 작업은 늘 한 방향을 가리킨다. 사물을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세계를 읽는 텍스트로 바라본다. 미술의 이름으로 해온 일 대부분은 사물의 그늘 속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 태도는 예술을 말하면서 동시에 삶을 말하고, 결국 우리 자신에게 '질문'으로 되묻는 방식이다.
그의 글들은 소소한 일상의 평범한 사물에 주목하고 사물의 이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흔히 지나쳐버리는 것들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특별하고 궁금한 것을 찾아내는 짧은 산책과도 같다고 전한다. 땅바닥의 작은 돌멩이를 바라보는 미시적 시점에서 세계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듣는 내내 고요하게 와닿았다. 그는 말한다. "그런 글을 쓴다고 해서 이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글이 세상을 변화시킬 이유도 없다. 사소해 보이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산을 옮기는 것처럼 큰일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수적석천(水滴石穿)이 떠올랐다. 아무리 힘들고 불가능한 일이라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룰 수 있으며, 물방울이 돌을 뚫듯 작은 노력도 꾸준히 계속하면 결국,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불파만지파참(不怕慢只怕站). 느림을 두려워하지 말고 멈춤을 두려워하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이 글들 속에 모든 아이디어가 녹아있다. 하루에 한 시간, 30분이라도 글쓰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미술작업도 멈춘 채,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글과 그림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붙잡고 펼쳐내고 가다듬으려는 방법이다. 사물은 감정과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나눈 소품의 도구이다. 세상은 색처럼 읽을 수 있다. 관찰한 대상을 통해서 세상의 단면을 책을 읽듯이 읽어낼 수 있다. 의자, 책상, 집.. 만든 사람의 생각이 정보로 가득 차 있는 책과 같다. 책은 문자로만 쓰인 책이 아니다. 그것의 제목이나 형태, 사용된 방식, 이런 것들을 관찰한다면 어떤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왜 그것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미루어 알 수 있다. 그것은 고고학자들이 발굴된 유물을 가지고 하는 일과 닮았다. 평범한 소품을 만들어서 쓰던 사람들의 삶을 유추해서 복원하고 그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의 '사물을 텍스트로서 읽는다'라고 한다면 사물의 언어를 가지고 말을 할 수 있다.
'사물로 말하기'는 내 미술작업에서의 근본적인 특성이다. (안규철 작가의 현장 담화 중 일부)
안규철 작가의 미술 작업은 그 자체로 질문을 제기하는 일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사물의 뒷모습’은 우리가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사물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그는 ‘사물’이라는 주제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로 사물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와 그 사물이 담고 있는 시간과 기억에 대한 질문이다. 그 질문을 통해 사물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물의 언어를 읽어내는 일
안규철 작가는 1990년대 초반부터 일상적인 물건들을 미술 작업의 주제로 삼았다. 사물을 통한 창작과정 속의 질문은 사물 자체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직업적 글쓰기를 떠나 독일에서 미술공부를 하던 그는 끝내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계간미술>이 <월간미술>로 바뀌면서 해외통신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독일 전시회 소식을 글로 보내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에서의 미술수업이 토론 중심 수업으로 이루어졌고, 창작과정을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당연히 작업에 대한 생각을 꼼꼼히 기록하는 쓰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일상의 쓰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에서의 미술교육은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고, 창작단계에서의 성찰이나 소회를 나누는 일들이 극히 드물었다고 전했다.
반면, 독일의 수업은 자신보다 어린 학생들이 서로 신랄하고 공격적인 질문과 토론을 했다. 그에 대한 대응을 하지 못하면 독일에서 공부한 이유를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작업을 변호하고 방어적인 쓰기를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구체적인 글로 끄집어내는 글쓰기의 시작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매일 아침 최소한 한 페이지의 글을 쓰는 것이 하루 일과 중 제일 중요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 글을 몇 번씩 읽어서 고친 후, 한 달에 한 편을 골라 <현대문학>에 삽화와 함께 보냈다. 그것이 유일한 글쓰기를 통해서 하는 일들의 과정이라고 했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예술적 창작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작업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사물에 대한 깊은 사유를 촉구한다. 그가 말하는 ‘사물을 읽는’ 행위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관계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작가가 말한 대로, 사물은 우리 기억과 자신을 잇는 대체 사물로서 사람 곁에 있었다. 사물은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우리의 내면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우리가 그 사물의 언어를 읽을 수 있다면, 사물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질문이야말로 예술의 시작
안규철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던지는 질문이다. “예술가는 질문하는 사람이다.”는 그의 말처럼, 예술은 단순히 미적 감각을 충족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행위다. 질문이 없으면 예술은 단지 형태에 갇힌 빈 껍데기가 될 뿐이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일상을 반복하는 이유는 단 하나,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이 없으면 우리는 단순히 주어진 정답을 따르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질문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변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이란 감동을 전하고, 삭막한 세상에 아름다움과 온기를 불어넣으며, 나아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공동의 경험과 가치를 만들어내어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의 긍정적인 역할이라고 하는 밑바탕에는 '질문'이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양한 예술의 출발점은 결국 ‘질문’ 일 수밖에 없다.
자기를 표현하는 예술은 모래알처럼 많은 타인들 속에서 나는 어떻게 특별한가, 왜 대체될 수 없는가를 묻고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만약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그 상태에 대해 어떤 의문도 결핍도 느끼지 않는다면 굳이 예술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고 자아를 찾아 나설 이유도 없을 것이다.
주어진 일을 운명이라 생각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술가는 더욱 그래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의 교육은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의 교육. 그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질문하기보다는 대답하는 교육을 받았다. 던져지는 질문에는 정답이 있었고, 학교는 정답을 외워서 대답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철학 같은 과목은 아예 교과과정에 들어가지 않았고, 대학에서도 극소수의 전공자들 외에는 철학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대답 잘하는 모범생들이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다니고 지도층이 되어서 권력을 행사하지만, 이들 스스로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정치적 불행의 근원 역시 여기에 있다. 지도자를 포함한 보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이라도 스스로 질문을 했더라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사태가 질문하지 않고 주어진 정답을 따라가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이 세계 속에서 살아날 수 없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있다. 지금까지의 교육 방식은 문제해결을 할 수 없다. 인구절벽, 극심한 이념 갈등 속에서 질문하지 않고 앞만 보면서 살아왔던 결과이다.
새로운 전환의 시대에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인간은 일을 하는 존재다. 자신 앞에 놓인 세계를 자신의 의지에 의해 강화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일을 하려면 세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그는 '빌렘 플루서'의 세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다.
1. 세계는 어떤 상태인가? (존재론적 질문)
2. 그 세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당위론적 질문)
3.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론적 질문)
근대는 첫 번째 질문에 집중했다. 객관적이며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근대 이전에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신에게서 찾았다.
현대는 세 번째 질문인 방법론의 질문이 모든 판단에 작용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순응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일은 결국 생존에 필요한 수단으로 그친다.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가 받은 교육은 정답을 외우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교실에서는 질문보다 답을 찾는 데 집중했다. 이런 교육 시스템은 결국 질문을 두려워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잃게 만든다.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는 일은 그 자체로 큰 도전이며, 이 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깊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질문하는 인간들 중 소수의 부류이다.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질문하지 않는 세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잡다한 재료와 매체와 미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술가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나의 작업은 일상의 물건을 비틀든, 다른 것들과 결합을 하든, 이야기를 만들든,
질문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숨겨진 것을 드러내고, 이 사회에 대한 바른 관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업의 목표이다. 대량생산 소비사회 속에서 감각적 쾌락과 오락이 넘쳐나고 있다.
사물과 인간의 관계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으로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주변의 사물과 자신이 긴밀하게 엮어 있었다.
사물은 우리 기억과 자신을 잇는 대체 사물로서 사람 곁에 있었다.
현재는 휴대전화를 바꾸고 차와 집을 바꾼다.
그들과 맺는 것들은 일시적이고 사무적이 되었다.
애착하거나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사물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읽는 시간도 없고 질문할 일도 없게 된다.
빨리 소비하고, 빨리 폐기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우리와 사물의 관계는 냉랭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런 현상은 사람과 사람관계에도 전이된다.
사물을 통한 미술 작업과 사물에 대한 글쓰기가 이런 상황에 대한 이의제기라 할 수 없다.
그것이 지금의 AI와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고 있는 시대에 시대착오적이고 허망한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의감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사물을 관찰하고 그들의 참세계에 다가가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이 AI에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가치가 아닐까 한다.
질문으로 살아가야 한다.
안규철 작가의 긴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는 길, 지금까지 나의 어린 날을 돌아 퇴직 전까지 머물렀던 교실의 풍경이 떠올랐다. 정답을 말하는 아이들 대신, 질문을 머뭇거리며 품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질문을 말하고 싶어 입술을 떼다가 다시 다문 아이들,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딘가의 결핍을 처음 느끼던 그 순간들.
수만 가지의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요즘 <교육>을 주제로 글을 쓰게 되면서 시대의 질문 하나를 붙들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 하는가...
나를 나로 서게 하는 내면의 힘, 세계와 맞서는 단단한 질문의 힘을 기성세대가 물려주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예술에 대한 언급이자, 우리 시대 교육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정답을 향해 총총히 걸어가고, 표준화된 모범생들이 지도층이 되는 사회.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한한 정보가 아니라, 묻고 의심하고 다시 읽어내는 힘이다.
그 힘이야말로 이 시대가 다음 세대에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지혜 교육이다.
예술도, 교육도, 삶도 결국엔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그리고 그 방향은 거창한 해답이 아니라, 아주 작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글벗 되어 주심에,
머물러 읽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사진.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