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day. 황유원 시인과 만나다
시를 쓸 때면, 쓰는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사라진다. 통편집된 것처럼, 황홀히 타오르는 백열(白熱)과 함께 잠시 사라지는 머리. 하지만 그렇게 사라진 시간의 여파는 엄청나다. 그 후의 삶은 오직 그 시간을 되찾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나는 그 모든 시적 시간을 '일요일'이라고 부른다. 시를 거의 받아쓸 때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일요일의 예술가'가 되어 있다. <황유원의 편지 中>
*일요일의 예술가. 황유원. 난다. 2025.
'일요일의 화가(sunday painter)'란 평일에는 주업에 종사하다가 주말에만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흔히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황유원 시인은 전한다.
그는 앙리 루소의 팬은 아니지만 '일요일의 예술가'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고, 앙리 루소의 그림에서 풍기는 일요일의 정서까지 사랑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이것을 제목으로 시를 쓰거나 시집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일요일의 예술가」로 출간하며 실천에 옮겼다. 일주일 전, 시집은 10월 31에 1쇄 발행을 했고, 그다음 날인 11월 1일에 그를 만났다.
사실, 그에 대한 사전 정보가 빈약했다. 다른 시인들의 시집을 모아 읽는 동안, 그의 시는 잘 알려진 번역 책에 묻혀 있었다. 적어도 내게는... 「모비딕 1.2」,「위대한 개츠비 」, 「패터슨」, 「폭풍의 언덕」... 을 번역한 이가 그다. 그 외 알만한 번역서들은 그의 손을 거쳐 간 것들이 꽤 많다.
그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말의 온도'였다.
시인이라면 단어를 쏟아내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단어를 삭히는 사람이었다.
말을 오래 숙성시켜 꺼내는 사람, 단어의 결을 더듬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가 한 명과 여덟 명의 시인들은 그의 젊은 날을 눈과 귀로 함께 걸었다.
한때, 그는 '시에서 도망친 사람'이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일부러 문학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았다.
성격이 꼬여서 그랬는지, 시를 너무 좋아해서 함부로 대하기 싫어서였는지, 자신을 더 가혹하게 몰고,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고 했다. 그래서 오히려 시를 멀리했다고.
'문학' 비 전공자이면서 '철학'을 공부한 그가 번역으로 벌이를 하며,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했다.
결국 시인이 되었다.
무거운 걸 싫어한다는 그는 살면서도 어디까지가 가벼운 일이고, 어디까지가 무거운 일인지 모른다.
머릿속으로는 일의 경중을 재고 있지만, 항상 최선을 다했다. 살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고.
그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무겁다고 덜 힘을 쏟을 수도 없고, 가볍다고 대충 지나칠 수도 없다.
살다 보면, 무게를 정하는 건 일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결국 중요한 건 일의 경중이 아니라, 그 일을 대하는 태도의 온도이다.
사람은 자신의 일에 온 마음을 쏟고 최선을 다했을 때 마음을 놓고 즐거워한다. (주)
그래서 요즘, 그는 서곡이나 에튀드인 연습곡에 빠져있다.
에튀드는 스킬을 닦는 곡이기도 하고, 서곡도 오페라 시작하기 전의 오프닝 같은 가벼움이 좋아서다.
이처럼 서시, 서론만 있는 것들을 모아서 시집을 엮고 싶다 했다.
대단한 삶도, 대단하지 않은 삶도 없다.
삶을 쉽게 사는 이가 없으며, 모두 힘들게 산다.
인간은 모두 다른데 누구는 어떤 계기로 자신의 다름을 잘 나타낼 수 있고, 누구는 그렇지 못해서 다소 진부하게 다룰 수밖에 없을까. 자기 세계를 어디까지 나타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직면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시에 개성을 많이 드러냈다. 사람들이 '시를 왜 이렇게 이상하게 썼냐'라고 물으면 정한 답을 한다.
'외골수로 혼자 써서 그렇다. 교류가 없었다. 늘 메모장에 썼다.'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음악과 그림과 영화였다. 중고등학교 때 그림을 그렸던 그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아마추어 예술가', '아마추어 작곡가'라고 부른다.
예술에 있어서는 갇히지 말자고 다짐한다.
우리의 일상도 하나의 예술처럼 다뤄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정해진 답을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만의 감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일이니까.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해내고 성취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답게 느끼고 표현하는 일도 매우 소중하다. '갇히지 말자'라는 말이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삶의 형식보다는 자유롭고 충만해지는 것 말이다.
과거에는 ‘철학을 공부해야 더 깊은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이 일종의 클리셰처럼 쓰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이 시에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사고를 훈련하는 데에는 철학책이 유용하다고 했다.
에세이는 읽을 때 편하지만 머리에 쥐가 나지는 않는다.
반면 철학서는 읽을 때는 고통스럽지만, 다 읽고 나면 뇌의 근육이 단련되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근육이 생기면 시가 써지는 것은 아니다.
시적 사고와 철학적 사고는 서로 다른 결을 가진 두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시를 쓰고, 다양한 쓰기를 고민하고 있는 내게 철학은 분명한 자극이 된다.
철학은 단어의 뿌리를 파고들게 하고, 문장 안의 공백이나 여백을 들여다보게 한다.
논리의 언어로 쓰인 철학을 읽다 보면, 감성의 언어로 쓰인 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철학이 나에게 준 것은 사유의 근육만이 아니라, 사물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어에 대한 그의 호기심과 재미였다.
단어 하나로 시를 쓰는 경우도 많다.
단어를 '압축파일' 풀듯이, 여러 각도로 비쳐보면 다양한 색을 뿜는다고 한다.
한자어, 외래어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것이 지닌 소리가 재미있고, 한자어는 특히 뜻이 흥미롭다.
새로운 단어를 접하고 그 어원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인도철학을 배우면서 단어에 대한 자극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문예 창작과나 국문과 수업을 전혀 받지 않았던 그는 오히려 옛날 문학에서 단어 자극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한다. 특히, 나 자신만의 방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단어의 질감이나 단어를 사물처럼 본다고 한다.
그야말로 단어를 사방에서 360도로 말이다.
우주생성론, 형이상학을 좋아하는 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유일무이한 일자가 있고 모든 것이 전개되고 환원되며, 하나가 있고 전체가 펼쳐지고, 그 전체가 또 하나 되는 원리. 단어 또한 펼쳐져서 우주가 되고, 우주가 펼쳐져서 단어가 된다는 그의 신박한 말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단어는 나에게도 우주다.
때로는 너무 작아서 손끝으로 쥐어야 하고, 때로는 너무 무한해서 감히 품을 수 없다.
그의 말처럼, 단어는 펼쳐져서 우주가 되고, 다시 응축되어 하나의 사물이 되기도 하고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 무한한 순환 속에서, 인간이 언어로 세계를 계속 다시 짓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글벗지기인 지담 작가가 떠오른다.
한 단어로 정신의 씨름을 하는 그녀의 투혼도 곧 출간되는 '소고집' 두 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언어는 결국 인간이 세계를 다시 짓는 도구이자,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통로다.
글을 쓸 때마다 그가 말한 단어의 질감을 떠올린다.
단어는 사물처럼 손에 잡히기도 하고, 빛처럼 흩어지기도 한다.
가끔 24시간인 하루가 너무 짧다......
주> 자기신뢰 철학/ 영웅이란 무엇인가. 랄프왈도에머슨. 동서문화사. 2020.
글벗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래요^!^
사진.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