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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시적 사물: 택배상자>

by 모카레몬
택배상자.jpg




건물 뒤에 서 있으면

앞에서 하던 말들은 여기까지 오지 않는다

말은 길을 잃기도 하지만

일은 제 갈 길을 안다


배달 트럭은 비슷한 시간에 들어와 같은 소리로 멈춘다

상자를 내려놓는 자리는 날마다 다르다


손짓도 표시도 없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야 했던 것처럼 자리가 잡혀 있다


상자를 끝까지 옮긴 쪽은 손이 먼저 달아오르고

벽에 몸을 붙였던 쪽은 그늘이 깊다고 느낀다

비슷한 시간에 같은 일을 건넜는데

제 몸은 각각 다른 쪽으로 식는다


상자에 붙은 주소들은 이 건물과 상관없고

올라갈 것과 올라가지 않을 것은

앞쪽 숫자와 몇 글자에서 갈린다


테이프가 뜯기고 종이가 접히는 동안

앞에서 바빴던 손은 물러나고

뒤에서 부산한 손이 온다


일은 앞면에서 뒤편으로 조용히 길을 바꾼다


되고 나서야 그렇게 된 줄 안다

누가 정했는지 묻기도 전에 순서는 이미 건너가 있다


상자는 줄었다가 다시 쌓이고 비워진 곳은 곧 그만큼 채워진다

쌓일 건 쌓이고 접힐 건 접히면서 오늘은 하루가 될 만큼 사용된다


누가 밀어 넣은 것도 아니고 억지로 채운 것도 아닌데

비어 있던 틈들이 서로를 밀지 않고 맞물려 있었다

보이지 않는 쪽에서 순서 몇 번이 바뀌었고

바뀐 순서는 오늘이 하루가 되었다


말로 돌아갈 일도 다시 앞설 일도 없이

하루가 종일 몫만큼
다 쓰인 채로


여기까지 왔다






택배를 기다리는 날이 있습니다.

배달트럭 앞으로 택배상자들이 쌓이고 흩어질 때마다

기사님들의 노동과 시간이 수많은 집 안쪽으로 옮겨집니다.

어둑발이 긴 하루를 쓰고 한 번 더 접힌 쪽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때로는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날조차도

앞에서는 어긋난 채, 또는 어디선가 순서가 바뀐 덕분에

하루가 될 만큼 이미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전도서9:11)


사진. pixabay.



글벗되어 주시고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천이십오년의 삼십일일을 남겨 둔 첫 날,

힘차고 활기차게 화이팅하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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