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무들

삶을 짓는 문장 76.

by 모카레몬
순환의 리듬은 성장의 힘이다

The rhythm of cycles
is the strength to grow.



우리가 자신의 철없는 생각을 두려워하는 저녁때면 나무는 속삭인다. 나무는 우리보다 오랜 삶을 지녔기에 긴 호흡으로 평온하게 긴 생각을 한다. 우리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동안에도 나무는 우리보다 더 지혜롭다. 하지만 우리가 나무의 말을 듣는 법을 배우고 나면, 우리 사유의 짧음과 빠름과 아이 같은 서두름은 비할 바 없는 기쁨이 된다. 나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는 나무가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헤르만헤세. 창비. 2025.



나무(봄).jpg <어느 봄날>




어린 날, 나무들이 모인 곳은 항상 놀이터였다.

나무를 타고, 매달리고, 숨고, 붙잡았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나무에 올라 뛰어오르는 걸 따라 하다가 다쳐보기도 했다.

무릎에 피가 나면 흙을 털어내는 대신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아프다는 말을 참고, 붉은 기운이 나를 더 크게 했다.

상처는 금방 굳었고, 굳은 자리에서 새로운 피부가 돋았다.

친구들과 아름드리나무에 두 팔을 벌려 감싸 안기도 했다.

팔이 모자라면 옆 친구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나무를 안았다기보다 서로가 곁에 있었다.

나무껍질은 거칠었고, 나무가 있는 곳엔 늘 시간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똑같은 길을 돌고, 모양이 각기 다른 가지를 잡고, 매번 미끄러지면서도 깔깔거렸다.

반복이 지루하지 않았던 건 즐기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나무(여름).jpg <어느 여름날>




어른이 된 후엔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

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면 발이 느려진다.

나무에 올라가지도 않고, 놀이 삼아 나뭇가지를 줍지도 않는다.

대신 어디서 난 상처인지도 모르게 같은 자리를 만진다.

무엇보다 어디가 다친 건지 애매한 경우가 많다.

마음이 다쳤는지, 자존심이 다쳤는지, 시간이 다쳤는지..

상처를 확인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나무 앞에서는 발걸음이 늦어진다.



나무(가을).jpg <어느 가을날>




나무는 그런 속도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서 있다.

사람을 위로하려고 서 있는 건 아닐 텐데, 품에 안기듯 나의 호흡이 평온해진다.

말이 없어서 더 믿게 된다.

나무는 나를 쳐다보거나 평가하지 않아서 안전하다.


나무에 가까이 다가서면 껍질이 거칠다.

거칠다는 건 오래 살아왔다는 뜻이다.

거친 결 사이로 상처가 남아있고, 꺾였다가 다시 붙은 자리도 있다.

그 사이로 시간이 눌어붙어 있다.

무심코 껍질 홈에 손톱을 한 번 넣었다가, 흙가루가 손끝에 묻는 걸 본다.

나무는 자기 몸에 지나간 것을 지우지 않는다. 그냥 남겨둔다.


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종종 '반복'과 '순환'을 생각한다.

반복은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일이다.

순환은 돌아오되, 다른 쪽으로 옮겨가는 일이다.

같은 계절이 와도 공기는 다르고, 같은 잎이 나도 색은 다르다.


나무는 해마다 잎을 내고 해마다 비우지만, 이전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껍질의 금이 한 줄 더 생기고, 가지의 방향이 조금 바뀌고, 그늘의 모양도 달라진다.

나이테도 늘어나는 줄무늬에 시간의 겹을 만들어낸다.

돌아오는 계절의 동작을 되풀이해도 그 동작을 통과하는 나무의 몸은 매번 다르다.

내 하루도 그렇게 지나가길 바란다.




나무(가을)1.jpg <어느 가을날>




젊은 날을 지나는 동안 반복을 싫어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면 거기서 멈춰버릴 것 같았다.

새로움이 없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자꾸 다른 곳을 생각했다.

이사, 새로운 사람, 새로운 취미, 새로운 운동, 새로운 책, 여행...

무언가를 바꾸면 나도 바뀔 거라 어쭙잖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삶의 대부분은 새로움이 아니라 익숙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익숙함을 관리하는 능력은 매일 같은 자리에서 한 겹씩 자라는 일에 가깝다.


나무 앞에서 지나온 젊은 날의 반복을 다시 본다.

내가 싫어한 건 반복 자체가 아니라, 반복 속에서 내가 자라지 못한다는 감각이었다.

오늘과 내일이 너무 비슷해서 제자리에서 맴도는 불안이 서성였다.

그래서 더 서둘렀다.

불안이 나를 멈추게 하지 않았고, 속도를 더 높였다.

빠르게 살면 변화가 생길 것 같았고, 변화가 생기면 살아있음을 더욱 느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빠르기는 종종 나를 더 얇게 만들었고, 충만하지 못했다.



나무(겨울).jpg <어느 겨울날>




나무는 느리다.

바람을 흘려보내지 않고, 비를 피하지 않으며, 햇빛을 그대로 들인다.

그 모든 것을 통과시킨 뒤에야 나무 안쪽에 한 겹의 나이테가 생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두꺼워진다.


순환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같은 듯하지만 다른 하루들이 층층이 쌓일 때 삶은 비로소 굵어진다.


나의 하루는 순환하고 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작은 반복의 결과가 내 몸에 남도록 하는 방식이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일을 끝까지 해보는 것.

그건 루틴이기도 하고, 패턴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쌓여 내면의 성장판을 만든다.


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발걸음이 느려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때론 조급하게 반복하며 소비하던 하루를 순환의 리듬으로 되돌려 올 수 있다.

되돌아와도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헤르만 헤세의 나무처럼, 좀 더 자란 내가 오늘 여기 있다.




글벗 되어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와 함께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래요^!^


사진. by mocale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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