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새벽을 앞둔 밤 11시 40분.
시야를 가득 채운 유리 벽 너머로 도심의 불빛이 아스라이 퍼져 있었다. 윤강현은 어둡게 꺼진 차량 안에 앉아, 핸드폰을 천천히 손에 들었다.
지워졌어야 할 이름 하나가 화면 위에 떠올랐다.
‘이정석 사장’
지운다고 잊히는 건 아니었다.
그 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잠시 멈칫했다.
전화 한 통에 무언가가 다시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너무 이르다…”
스스로 되뇌었지만, 손은 이미 발신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수신음 두 번. 그리고 익숙한, 낮고 건조한 음성.
“……죽지 않았군.”
예상했던 인사였다. 윤강현은 짧게 웃었다.
“죽기엔 아직… 할 일이 많아서요.”
“네가 나한테 먼저 연락하는 날이 오다니. 무슨 일이지?”
“사실… 상황이 좀 꼬였습니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어서요.”
“정리 못 하겠다는 소린가?”
“예전 같았으면 혼자 정리했겠지만… 이번엔 좀 다릅니다. 규모가 큽니다. 예측도 어렵고, 방향도 너무 틀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나한테까지 연락할 정도인가?”
“사업 쪽 문제라고 보시면 됩니다. 내부 인물 하나가 이상하게 얽혔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데, 흐름이… 뭔가 석연찮습니다.”
“이름은?”
“백준기. 겉으로는 그냥 프리랜서입니다. 원래 그랬고, 저랑도 오래 거래했습니다. 근데 최근 며칠 사이에, 설명이 안 되는 자금 흐름이 포착됐습니다. 무언가 큰 금액이 들어왔다가, 너무 빠르게 분산됐습니다. 누구도 모르게요.”
“금융 쪽이면 다른 창구로 넘기면 되지 않나?”
“문제는 그 돈이 어디서 온 건지, 아무 기록도 없다는 겁니다. 해외에서 시작된 흐름인데, 이게 그냥 흔한 외환 이상으로 안 보여요.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이정석은 짧은 침묵 끝에 말했다.
“위에서 신경 쓸 만큼 큰 일인가?”
“확신은 없습니다. 다만… 느낌이 이상합니다. 이건 단순한 자금 유입이 아니라… 흐름 자체를 바꾸려는 움직임입니다.”
“해외 쪽?”
“네. 그쪽에서 꽤 교묘하게 막아 들어오고 있습니다. 예전 방식이긴 한데, 방식이 많이 세련됐습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어요.”
“그리고 넌 그걸… 나랑 상의하고 싶다는 거군.”
“죄송합니다. 원래는 모든 게 정리된 후에 연락드리는 게 순서였지만… 타이밍이 너무 빠릅니다. 이번엔 혼자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평소의 너 같지 않군.”
“그래서 더 불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정적. 통화 음질 너머로 윤정석의 숨소리가 낮게 들렸다.
“좋다. 위치 보내라. 두 시간 뒤, 예전 그 자리.”
“감사합니다, 사장님.”
뚝—
통화가 끊겼다.
윤강현은 핸드폰을 조용히 내려놓고, 조수석에 놓아둔 서류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백준기의 최근 거래 내역, 통화기록, CCTV 캡처 이미지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서류 속 한 장의 사진.
가벼운 회색 니트를 입고, 종로 어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어딘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백준기의 모습.
겉보기엔 전혀 위협이 없어 보이는, 너무도 일상적인 얼굴.
하지만 윤강현은 뭔가가 껄끄러웠다.
지나치게 평범했고, 지나치게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넌 지금 어떤 게임 안에 있는 거냐…”
그의 시선이 점점 차가워졌다.
그리고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예전 그 자리.
이정석과 마주 앉는 그 장소는 언제나 큰 결정을 내리는 밤이었다.
[소설:큐비트 프로토콜] 12. 암호화폐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