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정중했고, 비공식적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다는 태도.
하지만 말의 온도와 시선의 방향,
그리고 그들이 주고받지 않는 ‘정보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감시의 문법이었다.
미국 측 요원 두 명.
하나는 전직 국방부 자문관 출신,
다른 하나는 자산 회복 전문 분석가라는 명함을 건넸다.
둘 다 민간 소속인 듯 말했지만,
그 둘 사이에 흐르는 말 없는 공조는
정부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백준기 씨의 안전은 우리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국제 자산 범죄에 해당하는 사안이고,
그 규모는 이미 FBI 내부 보고서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안에선 이미 다른 감각이 작동하고 있었다.
너무 빠르다.
그들의 접근이.
그리고 정보 파악이.
이건 단지 감시를 넘어,
무언가를 확인하러 온 태도였다.
그날 밤,
나는 백준기와 함께
그들의 말과 표정을 조용히 복기했다.
“감시였던 것 같죠.”
백준기가 먼저 말했다.
“도와준다는 사람 치곤, 우리가 뭘 아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어요.
대신… 우리가 뭘 ‘가졌는지’는 알고 있는 느낌이었고요.”
나는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미국은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덧붙였다.
“전 세계 비트코인 거래량 중 절반 이상이 미국 기반 거래소를 통해 이뤄지고 있어요.
탈중앙을 표방하지만, 결국 기반은 중앙에 몰려 있죠.
북한, 중국, 러시아—그들은 해킹으로 그것들을 빼가고 있고,
미국은 그걸 모를 리가 없어요.”
“방조라고 보나?”
“아뇨. 그렇다고도 말 못 하죠.
단지, 알고 있었거나,
혹은… 일어나도록 놔뒀을 가능성.
이런 혼란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더 키우거든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중국은 왜 이걸 벌였을까.”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양자 컴퓨터.
중국은 지금 인공지능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미국의 반도체 제재 때문에, GPU든 서버든 전부 막혔어요.
그래서 AI 대신 양자 컴퓨팅에 사활을 거는 중입니다.
양자는 미국이 쉽게 막기 힘든 분야예요.
물리적 제약이 작고,
정책보다 ‘기술 개발 속도’가 관건이니까요.”
“비트코인은 블록체인 기반이고,
블록체인의 보안은 전통적인 암호 체계에 기반하죠.
양자 컴퓨터가 이걸 뚫어버리면…
단 한 번의 연산으로, 10년의 채굴을 훔쳐낼 수 있어요.”
그 말엔 무게가 있었다.
그는 그 가능성을 상상한 게 아니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물었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나?”
잠시 망설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군 복무 때 운전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부대에 전산실이 필요해서
자체적으로 꾸리는 과정에 투입됐어요.
원래 다루던 것도 아니었지만… 익숙해졌죠.
제대 후 보안 회사 다녔고, 지금은 포럼 하나 운영 중입니다.
정보 보안 관련해서, 이름 있는 사람 몇은 압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우연히’ 이 흐름에 들어선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의 계좌로 비트코인이 흘러든 건,
‘선택’이 아니라 ‘지정’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그를 통로로 삼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고,
그의 존재는 누군가에 의해 오래전부터 ‘준비’됐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혹은, 그 흐름의 일부였는가.
나는 결국
미국 측에 ‘중국의 관련 기술과 조직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다.
정식 요청은 아니었고,
정식 요청으로 받을 수 없는 정보였다.
그들의 반응이,
이들이 ‘우리 편’인지,
아니면 또 다른 ‘플레이어’인지 알려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백준기에게 말했다.
“지금부턴, 정보 하나도 조심해서 넘겨야 합니다.
미국도…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편’은 아닐 수 있습니다.”
백준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서,
나와 똑같은 판단이 이미 내려졌다는 걸 느꼈다.
20.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