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되어 선물해 준 엄마라는 이름
사망선고가 내려진 후 엉엉 울던 우리 부부에게 간호사 선생님이 “재신이를 후처치 한 후에 다시 보여드리겠다”라고 했던 거 같다.
이 부분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너무 울어서 기억이 흐릿한 느낌이다. 잠시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시 안내를 받고 아이를 보러 갔다.
아무런 약줄이 달려있지 않은 아이의 모습은 처음이라 조금 낯설었다.
아이의 사망원인은 심장 판막이 아닌 패혈증이었다. 의사 선생님 말에 의하면 패혈증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추측하건대 몸이 붓고 안 좋았을 때 이미 패혈증 바이러스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복부 관으로 소변을 빼내면서 상태가 호전됐을 때 패혈증도 같이 퍼진 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어떠한 것도 시도해 보지 못하고 아이를 떠나보냈다. 너무 작은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간호사 선생님께 물었다.
아이를 안아봐도 될까요
안아봐도 된다는 대답에 나는 망설임 없이 아이를 안았다. 한 번도 안아 주지 못한 것이 평생 한이 될 거 같아 아이를 안았다.
따뜻하고 온기가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아이는 이미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 체구가 작은 만큼 사후 경직도 빠르게 되는 거구나..‘란 걸 깨달았다. 퉁퉁 불어버린 젖은 뜨겁게 부풀었지만, 먹어 줄 아이는 차갑고 사늘해져서야 내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이때의 기억은 마음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병원에서는 아이를 일단 병원 영안실로 내려보낸다고 했다. 화장을 위해 염을 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염을 하고 나서 화장터로 가기 전 아이와 같이 태워주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챙겨 와도 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태교로 만들었던 손싸개 발싸개가 떠올랐다.
손재주가 영 없는 편이라 호기롭게 배냇저고리 손싸개 발싸개 세트를 사서 태교를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삐뚤빼뚤한 솜씨로 손싸개 발싸개만 겨우 만들고 배냇저고리는 차마 완성하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내 뱃속에 있던 총총이를 생각하며 만든 거니, 총총이에게 주는 것이 마땅했다.
집으로 돌아와 돌아오면 입히려던 배넷저고리와 손싸개 발싸개를 챙겼다.
소식을 들은 시누이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리곤 우리 부부와 시누이는 염이 된 아이를 보러 갔다.
내가 챙겨 온 배냇저고리와 손싸개 발싸개를 한 채 눈을 감고 누워있는 재신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현실감이 없어서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았다.
눈썹은 날 닮았다. 눈은 남편을 닮았다. 코도 남편을 닮았고 입은 날 닮았다. 얼굴형은 날 닮았다.
손에 내가 만든 손싸개를 하고 누워있는 아이를 보며, 바보같이 못난이라도 배냇저고리를 완성하지 못한 나를 책망했다.
그것까지 같이 해서 보냈어야 했는데.. 열 달을 기다려 14일을 살고 간 너에게 엄마라고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는데 난 또 이 기회를 놓쳐버린 바보 멍청이였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울었어야 했다.)
정신을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는데 바보같이 또 참고 참았다. 그랬다. 언제나 나 자신은 뒷전이었다.
그날은 시간이 늦어 화장터로 갈 수 없어, 화장은 다음날 하기로 했다. 병원에서 나온 후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주무시겠다고 했다.
아이를 잃은 부부가 단둘이 신혼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내내 불안하셨던 모양이다. 마땅히 와서 주무실 데도 없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괜찮다고 내일 다시 보자고 이야기한 후 우리 부부는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묵묵히 저녁상을 차렸다. 남아있는 미역국에 밥반찬을 대강 꺼내 상위에 올리고 우리 부부는 밥을 먹었다.
밥알이 모래알같이 까슬거렸지만, 그냥 먹었다. 먹어야 했다. 내일 우리 아기를 보내야 하니까.
10월 9일 총총이를 보내는 그날은 맑은 가을하늘이 펼쳐진 날이었다.
그 해는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어 쉬는 날이 된 해였다. 이렇게 맑은 날 우리는 화장터로 가고 있었다.
이때의 나는 화장터로 가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무책임한 말이라 생각했는데 그 말이 가장 큰 위안이 된다는 사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씁쓸해졌다.
‘엄마가 날 버리고 떠났을 때, 내 심정은 어땠지?’
그때는 내 마음이 어땠었지 생각해 봤다.
그 당시엔 희망이 있었다. 엄마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지만 이 일엔 희망이 없었다.
엄마는 산 채로 나갔지만, 총총이는 죽었으니까.
처음으로 아이를 잃기 전에 엄마가 집을 나가 버린 게 고맙게 느껴졌다. 가장 큰 불행을 학습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경험도 경험이라고, 이것이 끝내 지나간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주문은 마스터 키였으니까.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결국 지나간 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었다.
아이가 누워있는 관에 화장터 번호가 지정되었고, 그 내용을 알리는 화면에 화장 중이라는 안내문구가 떠올랐다.
야속하게도 재신이는 너무 작아 화장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내 눈을 차마 마주치지도 못하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까지 건넸다.
더 이상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내 아픔은 철저히 숨기고 묻어 괜찮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 순간 난 누구보다 유능한 마법사였다. 나 자신도 속일 정도로 이 일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얼굴이었으니까.
나에게 지금 일어난 이 상황을 머리론 이해하고 있었고, 마음의 소리는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울어도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저 마지막을 담담히 대면해야 했다.
그렇게 작은 항아리에 담긴 아기를 안고 화장터 밖으로 나왔다.
옆에서 시누이가 그랬다.
“남의 속도 모르고 하늘이 너무 맑아.. 날씨가 너무 좋다”.
그때 내 대답은 이러했다.
형님,
저는 날씨가 좋아서 좋아요.
우리 총총이가
하늘로 가는 길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갈 수 있을 테니까요.
엄마가 같이 가주지도 못하는데 절 닮아 길치면 어떻게요. 그러니 괜찮아요 날씨가 맑아도, 야속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