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곱씹어서 발음할 것
사람은 사랑을 자기가 아는 만큼만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더라도 내가 가늠할 수 있는 사랑은 내가 아는 만큼이다. 그래서 어릴 때에는 부모님의 나의 끝없는 물음표에도 무한한 답을 준 것이 사랑인 줄 모르고, 주 6일을 일하고 부모님이 토요일 오후에 출발해 6시간을 달려 여행을 갔다온 여행이 사랑이 얼마나 큰 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그런 사랑을 하게 될 때쯤 어렴풋이 알게 된다.
홍시는 사람에 비하면 아주 작지만 내게 그런 커다란 사랑을 알려준 존재다. 그리고 왜 사랑이 기침같은 것인지도 알려준 존재다.
반려동물을 들이는 건 많은 것들을 희생하게 된다. 매월 나가는 간식비, 사료비, 병원비도 그렇지만 내 공간에 반려동물을 위한 용품을 들이게 되고, 반려동물을 며칠 동안 혼자 둘 수 없기 때문에 여행을 다니는 데에도 제약이 생긴다. 또 이사를 하게 되는 경우에는 반려동물이 허용되는 곳으로 알아봐야 해서 이사할 때도 선택지가 좁아진다.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고 싶거나 냄새에 예민하다면 반려동물이 어지르는 집과 반려동물의 냄새도 견뎌야 한다.
이렇게 보면 반려동물을 들이는 건 경제면에서도 생활면에서도 참 아쉬운 것들이 많다. 반려동물을 데려오기 전에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항목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려동물을 데려온다면, 진심으로 돌보다 보면 반려동물이 내가 희생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주게 된다는 걸 알게 된다.
홍시를 데리고 오고 나서부터 내 삶에서 우울함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의 대부분을 홍시가 차지해 버렸다. 침대에 누워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에 잠식되어 갈 때 홍시는 저 멀리서 달려와 가슴팍에 올라와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그 잠식에서 잠깐 깨어나는데 그런 순간들이 쌓여서 홍시는 수많은 불안과 우울을 내게서 몰아내 주었다.
출근하려고 할 때도,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항상 홍시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고 홍시를 안고 쓰다듬고 빗겨주다 보면 나를 괴롭히는 잡생각들을 홍시가 핥아서 없애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내 팔에 기댄 채 자는 홍시의 뒷통수를 바라볼 때나 나지막이 홍시를 불렀을 때 자연스럽게 '에옹-'하고 대답하는 홍시의 목소리를 들을 때나 품에 안아 들었을 때 아기처럼 어깨에 감겨 들어오는 홍시의 촉감을 느끼다 보면 홍시의 존재만으로도 홍시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럴 때면 나는 직감한다. 내가 홍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알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참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내가 보기엔 그냥 집착 같은데 왜 그걸 사랑이라고 하는지, 그냥 호기심 같은데 그건 왜 또 사랑인지 알 수 없었다. 왜 부모님은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고, 그 사랑이 뭐길래 사람을 그렇게까지 희생하게 만드는 것인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홍시가 내게 자신의 무게를 온전히 실어서 내게 기댈 때, 밥을 먹다가도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에 쪼르를 달려올 때, 밤이 되면 꼭 내 품을 비집고 들어와 자기 몸에 힘을 빼고 자신의 존재를 나에게 맡길 때, 그때 온전히 홍시에게 나를 온전히 내어주며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홍시는 고양이라서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홍시는 그저 다른 호모 사피엔스보다 내가 좀 더 안전하다고 느끼고 다른 호모사피엔스 보다는 나에게 좀 더 애착을 가질 뿐이다.
하지만 나는 홍시를 사랑한다. 왜냐고 물으면 그냥 홍시가 내 반려동물이고 가족이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을 못하겠다. 홍시가 귀여워서도 아니고, 홍시가 예뻐서도 아니다. 그냥 홍시가 홍시이기 때문이다.
홍시를 위해서라면 심장도 바꾸어 주고, 사람처럼 두 다리를 달라고 하면 두 다리도 줄 수 있다. 홍시가 카톡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하면 부모님이 어린 시절 끝없는 내 질문에 답을 해주었듯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같은 걸 가르쳐 줄 수도 있다.
홍시를 사랑하기 때문에 홍시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을 알기 되었을 때 나는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실감하게 되었다. 물론 부모님의 사랑에는 조금도 못 미칠테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의 사랑의 크기를 그제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들이 나를 사랑하는 건 알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 홍시를 알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사랑에도 통용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쯤 되었을 때 나는 내가 홍시에게 무의식적으로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걸 깨달았다. 홍시에게는 매일 장난스럽게 어디서 이렇게 이쁜 고양이가 태어났을까? 누구 고양이길래 이렇게 이쁠까? 주접을 떨면서도 홍시를 안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홍시의 눈을 보면서도 어느새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고 내 품에 기대어 자고는 뒷통수에 대고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365일 정말 매일 나도 모르게 홍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수록 홍시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았다. 홍시는 매일 매일 나에게 사랑을 듣는다. 그래서 홍시도 나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일까? 홍시의 눈을 보고, 홍시의 털을 만지고, 홍시의 사료 먹는 소리를 듣다 보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홍시에게 매일 표현하다 보니 이제는 홍시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홍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고, 얼마나 마음에 홍시를 품고 있는지 매일 표현하기 때문에 나는 홍시가 내일 사라진다고 해도 사랑의 표현에 대해서 만큼은 전혀 후회가 없을 것 같다.
줘도 줘도 부족한 게 사랑이겠지만, 그래도 홍시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얼마나 귀중하고 멋진 존재인지 홍시에게 난 털 갯수보다 더 많이 홍시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홍시가 내 곁을 떠나는 순간에도 홍시는 절대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홍시를 위해 하는 수많은 행동이 사랑이지만, 입으로 꼭꼭 씹어서 홍시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건 정말 '사랑' 그 자체라서 홍시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기분이다.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가 오롯이 청각을 거쳐 기억 한 칸에 남아있을 테니까.
홍시에게 무의식적으로 사랑한다고 얘기할 때마다 사랑은 정말 기침 같은 것이구나, 하며 왜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에게 사랑한다고 발음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정말 다양하지만, 저마다 가늠할 수 있는 사랑의 크기도 다르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이 모두 다르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이 심장을 거치고 뇌를 거쳐서 입으로 나오면 그건 가늠할 필요도 없는 가장 직관적인 사랑이다.
물론 말로만 하는 사랑은 의미 없다. 하지만 내가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면 꼭 발음해 줘야 한다. 그래야 안다. 나도, 그 대상도 사랑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