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SF의 역사와 현황, 그리고 미래
SF 소설을 선호하다 보니 SF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국내 작가의 SF 소설을 별로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도대체 한국의 창작 SF는 어떤 것들이 있고 무슨 특징이 있으며 실제로 얼마나 읽히고 있는지 등등 수많은 궁금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게 참 똘아이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한국 작가의 SF 소설을 골라서 하나씩 읽어보면 되는 것이지요. 버뜨 저는 그러지 않아요. 늘 그렇듯이 관련된 책이 있는지를 찾습니다. 그렇게 찾은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거의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매혹적이었습니다. 오홋, 이 한 권만 읽어보면 한국 창작 SF에 대해서는 어디 가서 아는 척 좀 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생각은 엄청난 함정이 있는데, 적어도 제가 생활하는 바운더리 내에서 도대체 어디 가서 한국 창작 SF에 대해서 대화할 일이 있단 말입니까? 결과적으로 어디 가서 아는 척은 할 일이 없을 거란 것이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만족이라도 해야겠습니다. "한국 창작 SF의 거의 모든 것" 누가 뭐래도 저의 취향과 궁금증을 한껏 채울 수 있는 정보와 글들로 풍성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 시점에서 출간된 지 2년 가까이 지나서 좀 더 신선할 때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하지만 내용으로 볼 때 아직까지 유통기한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앞으로 한참이 지난 후에 읽어도 그 나름의 가치는 여전히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궁금하면 관련된 책을 보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그러나 직접 부딪히기 보다 궁금한 분야에 대해 설명하는 책을 주로 찾아 있는 습관은 쪼콤 개선의 여지는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도 계속 그럴 거란 건 저도 당신도 다 아는 사실) 그리하여 앞으로는 해외 SF와 국내 SF 작품을 비슷한 비중으로 읽어보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대담한 제목의 책은 제목 그대로 국내 SF 작가와 작품은 기본이고 한국 SF의 역사와 현주소, SF 관련 종사자와 관련자 등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책을 차례로 읽다 보면 참여한 집필진도 다양하고 상당히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역 작가들이 SF를 쓰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 작법서 같은 초반 꼭지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흥미로웠습니다. 척박한 국내 SF 시장에서 버텨내고 있는 작가들이 솔직하게 자신의 경험과 바램을 담은 글이 와닿았습니다.
이어지는 SF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SF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에 대한 글도 좋았습니다. SF에 관심이 없는 분들조차 감탄사를 내지를 수 있을 만큼 유명인이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요. SF 쪽에서 유명한 분들의 글이라 해도 결국은 읽을 사람, 관심 있는 사람만 쳐다볼 것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지만 어쨌거나 뒤늦게라도 나는 읽었으니 거 뭐, 괜찮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관심이 갔던 부분은 책의 후반부 약 60여 페이지에 걸쳐 수록된 '한국 창작 SF의 미래를 위하여'라는 테마의 좌담회 녹취 부분이었습니다. 저도 평소에 저대로 국내의 SF 저변에 대해 고민 아닌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 오셨던 전문가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묘안이 있을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대담이라는 것이 늘 그렇지만 뒤통수를 탁 때려서 눈알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못 보던 것이 갑자기 보이는 수준의 결론은 없었지만, 다양한 의견과 견해는 재미있고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이 책은 비단 한국 창작 SF에 국한된 내용만 아니라 크게는 한국의 대중문화와 대중문학의 흐름과 현실, 나아갈 길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제공합니다.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버티고 한길을 걸어온 분들의 진솔한 이야기와 바램은 호소력이 있고, 울림이 있습니다. 녹녹치 않은 현실에 대한 약간은 처절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됩니다.
굳이 SF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SF 소설, 특히 국내 SF에 대해 궁금한 생각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슬쩍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너무 다양한 분야를 커버하다 보니 개인의 관심 영역에 따라 일부분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다 재미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띄어서 주목했던 분은 SF & 판타지 도서관 관장이신 전홍식 선생님의 글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이 SF에 관심을 가지게 하기 위한 관장님의 눈물겨운 노력과 실패담 들은 마음 아프게 읽었습니다. SF & 판타지 도서관은 원래 사당역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 계속 있었으면 제가 편히 자주 들를 수 있었는데 장소를 옮겨서 아쉬웠습니다.
관심 있게 읽은 또 한 분은 수준 높은 SF 관련 평론가시자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고장원 선생님이었습니다. SF 관련 총괄서라고 할 수 있는 책들을 시리즈로 계속 출간하고 계시고, SF 미래연구소*라는 웹 사이트도 운영하고 계신데 훌륭한 자료가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거의 저의 SF 학습의 교보재이자 즐거움의 원천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또.. 그러니까 국내 SF 소설이 궁금해서 읽은 책인데 앞으로도 SF는 안 읽고 SF 관련 서적만 계속 읽는 것은 아닐지 저 스스로도 궁금해집니다. 이런 책이 읽으면 또 엄청 재미지니까 주객이 전도되는 느낌은 있는데, 그 뭐 상관없지요. 누가 "주"고 누가 "객"인지 정해진 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