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식 [지상 최대의 내기] 중에서
삶을 살다 보면 그런 몇 초의 시간이 일평생을 바꿀 때가 있다.
(곽재식 - 지상최대의 내기 중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신중하게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대충 되는대로 흘러가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다. 지금은 그런 식의 삶의 태도를 유지할만한 여유가 없으므로.
신중하지 못한 태도는 특히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빛(?)을 발했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짧은 시간에 충동적이고도 합리적이지 못한 이유로 결정해 왔다. 대학을 선택할 때는 당시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학교라는 점과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이 많이 지원했다는 이유로 선택했다. 안타깝게도 같이 지원한 친구들이 다 떨어져서 결국 외톨이가 되었지만.
직장을 선택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누구나 잘 아는 국대 대기업과 한창 성장하던 신생 기업에 동시에 합격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기업을 선택하면 수원으로 내려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회사의 지명도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았고, 신생 기업은 여의도에 위치해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대기업은 면접 때 군대 같은 딱딱함과 위압감이 불편했다. 반면, 신생 기업은 면접 과정이 너무나 편안하고 친절한데다가 가족 같은 화기애애함 속에서 진행되어 일원이 되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회사였다.
양쪽 다 장단점이 명확해 고민이 되었으나 내심 신생 기업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던 차에 어이없는 이유로 대기업 행이 결정되었다. 어머니와 통화하던 중이었는데 어머니가 영어 이름 같던 신생기업을 발음하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입사를 하면 어머니가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자랑을 하셔야 할 테고, 나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야 하는데 어머니가 "회사가 뭐라 하더라?"라고 하시는 장면을 떠올리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어머니와의 통화 중 단 몇 초의 시간 때문에 나의 첫 직장은 대기업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대충(?) 한 결정이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첫 직장만 해도 애초에 마음이 기울던 신생 기업은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경영악화와 여러 가지 악재로 상장폐지와 워크아웃의 수순을 걸었으니 어머니가 나를 살린 셈이 되었다.
그러나 대기업 개발팀에서의 회사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야간에 챔버에서 실험을 하는 업무를 맡았던지라 집에 자주 갈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더 힘든 것은 술자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주량이 소주 2잔에 불과하던 나는 일보다 회식이 너 큰 괴로움이었다. 술을 너무 사랑한 나의 직속상관은 일찍 끝나는 날은 일찍 끝나서 술을 마시고, 늦게 끝나는 날은 수고했다며 술을 마셨다. 그 무렵 나는 대체로 1차에서 소주를 3잔 정도 마시고는 화장실로 가 다 비운 다음 다시 마시는 일을 반복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를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첫 직장에서 퇴사를 결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입사한 지 3년이 되어갈 무렵에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회사 앞 후배 자취방에서 잠시 자고 출근하는 일이 반복됐다. 덕분에 시간 외 근무 수당과 휴일 근무 수당으로 돈은 많이 받았지만 건강과 바꿀 만한 옵션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딱히 다른 직장을 찾을 만한 여유도 없는지라 그냥저냥 비슷한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맡은 프로젝트의 진척이 더디던 어느 날 부장님이 주재한 회의에서 또 한 번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개발 일정에 대한 부장님의 이런저런 역정을 듣고 있었는데 직속상관이던 과장님이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지목하면서 제대로 빨리 끝내지 않으면 "잘라 버리겠다"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 믿기 힘든 한 마디를 듣는 순간 내 마음속으로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바로 과장님께 퇴사 의사를 밝혔다. 물론 오랫동안 고민해 온 과정이 있었지만 그 짧은 순간이 내 속에 꿈틀대는 돌 아이 기질을 폭발시켰던 것 같다.
사실 그 회사의 속성 상 부장 한 사람이 자기 휘하 직원을 자르고 말고 할 권한은 없다. 나 역시 그런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부장 입장에서는 입사한지 3년 이하 사원이 퇴사를 할 경우 직원을 잘 관리하지 못한 죄로 리더십 부재라는 오명을 안게 된다. 그날 이후 그분이 나를 잡기 위해 했던 노력은 눈물겨웠다. 그렇다고 내 인생을 실험실에서 끝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1년쯤 다녔을 때 누구인지 나에게 어느 조직이던 최소한 3년은 다녀봐야 좋다, 나쁘다 판단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겠냐며 그만두더라도 3년은 다녀야 된다고 조언했었다는 점이다. 그때문인지 정확히 입사 후 3년을 딱 채운 날 퇴사하게 되었다.
거대한 조직의 그늘에서 나와보니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던 나는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거쳐 공기업에 입사하게 되는데 그 때문인지 지금 회사에 오랫동안 잘 다니고 있다. 그 때 이후로는 엉뚱한 이유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일이 줄었는데 그건 아마도 점점 내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아내의 의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느님의 절대적인 결정이 있는데 내가 대충 결정할 일이 뭐가 있겠나.ㅋㅋ
[지상 최대의 내기] 중에서곽재식 [지상 최대의 내기] 중에서
<지상 최대의 내기>는 곽재식 작가의 여섯 번째 소설집이다. 우리가 평소 접하는 일상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친숙한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우리 사회를 통쾌하게 비트는 놀라운 위트와 유머가 돋보이는 소설들이 가득하다. 조회 수 5만에 달하며 ‘환상문학웹진 거울’ 서버를 다운시켰던 초화제작 <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은 이런 작가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므로 특별히 강추한다.
곽재식 작가는 공학 박사이자 회사원이다. SF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소설을 발표하는 작가며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와 같은 작법서는 물론, 한국의 전통 괴물을 다룬 인문서 《한국 괴물 백과》와 과학교양서 《로봇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등 다방면으로 좋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한국적인 SF의 재미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피식피식 웃으며 즐겁게 읽을 법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