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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다돌아 Oct 04. 2020

창작자들의 공동주택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츠지무라 미즈키 장편소설 [슬로하이츠의 신] 책 리뷰


1. 함께 모인 창작자들의 성장과 분투기

   여기 슬로하이츠라는 공동주택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젊은 나이에 성공한 각본가 아카바네 다마키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잘나가는 소설가 지요다 고키를 필두로 다양한 창작자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화가와 만화가, 영화감독 지망생들이 있고 유능한 편집자도 함께 합니다. 이런 공동주택은 일본의 유명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와 여러 만화가들이 함께 살았던 "도키와 장"을 떠올리게 한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박경리 선생님께서 시골집에 여러 작가 지망생들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식사까지 챙겨주셨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겉보기에 무뚝뚝하고 강한 다마키의 자극을 받아 가며 슬로하이츠에 입주해 있는 젊은 창작자들은 서서히 성장해갑니다. 소설의 전반부는 특별한 사건보다는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이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등장인물들의 사연과 개성이 묘사됩니다. 저자는 슬로하이츠 입주자에 대해 익히고 관심을 기울이도록 자연스럽게 이끌어 나갑니다. 그렇기에 잔잔하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냥 잔잔하기만 하면 자칫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별 내용이 없는데도 자연스레 후반부 2권까지 읽어보고 싶도록 적당한 호기심과 소설적 매력을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공동주택에 입주한 사람들의 개인적 사연을 풀어나가며 하나의 큰 사건으로 엮어 나가는 이야기는 이미 상당히 익숙합니다. 이런 설정은 작가가 이야기를 창조해 나가기는 유리할지 몰라도 정작 독자에게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슬로 하이츠의 신"은 설정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을 만큼 매 장마다 매력적인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그 속에 등장인물들의 희로애락이 복잡하게 얽혀 더욱 다채로운 매력을 뽐냅니다. 



2. 다양한 캐릭터를 촘촘하게 엮어내는 스토리의 힘

   공동주택이라는 설정의 가장 큰 장점은 많은 캐릭터를 등장시킬 수 있고, 이들을 엮어 내는 기본적인 공통 접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쉽게 주어지는 것이 항상 장점으로 잘 활용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캐릭터를 일일이 설명해야 하고 각자의 개성이 돋보이도록 안배해야 하기 때문에 자칫 어느 캐릭터도 기억에 남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랜 내공으로 필력이 탄탄한 저자는 멋지게 캐릭터들의 매력을 발산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 캐릭터들의 상호작용도 촘촘하게 직조해 냅니다. 각자 캐릭터의 얽히고설킨 과거와 현재가 적절한 방식으로 펼쳐지면서 소설을 읽어나가는 독자가 서서히 이야기에 젖어들게 합니다. 마치 타인의 감춰진 비밀을 훔쳐보는 듯한 착각 속에 스토리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행이 잔잔한데도 자극적인 이야기처럼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한편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방식의 전개를 통해 독자는 적당한 객관적인 스탠스로 관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단편적으로 보이던 사건의 진실에 대해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서서히 하나씩 풀려나가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공감하기도 하고, 감동받기도 합니다. 특히 당연하게 생각하던 사건의 전말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때는 뒤통수가 뜨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기대치 않았던 놀라운 반전을 대할 때면 이야기의 힘은 물론 저자의 놀라운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됩니다.  



3. 함께하는 연대의 힘, 자기만의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은 상당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서로 생활 방식을 이해하고 정서적 어려움을 나눔으로써 창작에 더욱 전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는가 하면 끊임없이 상호 자극을 통해 성장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딱히 창작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공동주택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타인의 창작물을 소비하는 사람은 줄어들지만 스스로 창작을 해내려는 욕구는 더 늘어나는 추세에 이런 현상은 가속화되는 것 같습니다.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의 약점과 어려움을 보듬어주고 격려와 위로, 배려를 해 나가는 모습은 흐뭇합니다. 그러나 실상 배려하는 가운데서도 각자의 감춰진 속마음은 따로 있기 마련입니다. 저자는 이런 이중적인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도 통찰력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각자의 사정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잘 표현해 준 것처럼 서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고 친한 친구와 지인으로 지냈더라도 각자의 속 사정은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완벽한 타인"에서는 감춰진 진의의 부정적 요소를 부각시켰다면, "슬로하이츠의 신"에서는 오히려 긍정적이고 감동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부각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서로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몰래몰래 서로를 위해 지나칠 정도로 마음을 쓰고 배려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독자가 알게 되는 상황을 극적으로 연출하는 것입니다. 


   연대의 힘은 강합니다. 그러나 모든 연대에는 부작용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가까운 연대의 부작용을 소설의 소재로 적극 활용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느슨한 연대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서는 각자 스스로만 알 수 있는 감춰진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이를 악의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극한의 선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지점이 매우 훌륭하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가적 역량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전에 출간된 이 분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잔잔하게 시작해 폭발적인 반전으로 독자의 가슴을 후드려 패는 이야기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슬로하이츠의 신"을 추천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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