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 책 리뷰
1. 앤솔로지 효용의 극한 수렴
앤솔로지는 어떤 기획과 주제의식으로 누구를 참여시키는가에 따라 결과물이 크게 달라집니다. '모 아니면 도'가 되는 경우가 참 많은 형식입니다. 해냄 출판사의 신간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는 앤솔로지라는 형식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올린 소설집입니다. 기획이 시의적절하고, 주제는 다수 독자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하며 참여한 작가들의 수준이 높습니다.
다양한 나라를 배경으로 한국인이 겪는 일을 소재로 삼고 있어서 이국적인 풍미를 맛보고 생각할 것이 많아 좋았습니다. 좋은 소설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고 고민하는 일들을 담아내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삶을 관조하게 합니다.
이 앤솔로지는 타인과 나, 자아성찰과 인간관계, 문화 융합과 갈등 등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철학적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 평범하지 않은 설정과 등장인물, 서사의 흐름으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독특한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매우 영리하고 잘 된 기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국적이면서도 사색적이고 문학적인 이 소설들을 읽고 보니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순문학' 작품을 만난다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제가 순문학을 잘 안 읽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다양하게 읽어오던 장르소설 앤솔로지와는 또 다른 매력을 딥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약 10여 년 전에 읽었던 일본 소설 <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과 비슷한 느낌이 납니다. 당대 최고의 일본 여류작가들을 참여시켜 이국 땅에 여행을 보내주고 각자 공간에서 만난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써내도록 기획한 책이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가쿠다 미쓰요 등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던 작가들이 참여한 이 책은 이국적이고 독특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는 저에게 <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의 한국 버전으로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합니다.
2. 같은 주제, 각기 다른 매력
소설은 포르투갈 리스본, 인도 뱅갈루루, 태국 방콕, 사이판 등 각기 다른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각 나라들이 공통점도 별로 없고 너무 달라 어떻게 주제 의식을 잘 이어갈지 의아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작품 "해저로월"은 정선임 작가의 글입니다. 이 소설이야말로 전체 앤솔로지의 주제를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호기심에 책을 집어 든 독자들에게 이 책의 성격과 분위기를 제대로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해저로월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왠지 이 소설집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바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취향에 맞았던 소설입니다.
두 번째 작품 표제작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 역시 다양한 국적과 인종, 배경을 지닌 등장인물들에게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문화와 역사, 정체성과 가치관의 차이를 극적으로 잘 드러낸 소설입니다. 이해가 오해가 되고 자부심이 자존심을 가리는 감정의 파도와 답답한 상황을 따라가다 보면 저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부분에 닿게 됩니다. 상황 묘사와 인물의 감정선이 배치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세 번째 작품 "망고스틴 호스텔"은 저에게 친숙한 김의경 작가의 소설입니다. 그나마 심정적 거리가 가까운 태국인 데다가 현실적이고 디테일한 묘사가 여전한 매력 넘치는 소설입니다. 앤솔로지 전체를 볼 때 가장 결이 다르고 튀는 느낌도 있는 소설입니다. 김의경 작가의 글은 어디에서도 자기만의 문체와 스타일이 확고하게 드러납니다. 전체 앤솔로지를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소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 "낙영"은 가장 신비스러운 느낌이면서도 서정성 짙은 소설입니다. 고립과 단절, 미움과 사랑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매우 잘 살리면서도 하늘이나 바람, 물과 같은 시각적 묘사가 매우 뛰어나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소설입니다.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좀 난이하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읽기 힘든 소설이었습니다.
네 명의 작가가 각각 풀어낸 이야기들은 이국적이고 개성이 넘치지만 하나의 주제 안에 조화가 이루어지는 느낌입니다. 전체적인 구성, 글의 흐름과 리듬이 상당히 매력적인 소설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개 작품에서 보이는 작가들의 역량이 뛰어나 앤솔로지 한 권을 통해 좋은 작가를 여럿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 것도 큰 장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