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인생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퇴사하면서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면 주인공이 복잡한 마음으로 길거리를 무작정 걷는 장면이 있는데 퇴사 통보를 받고 나도 그 주인공과 똑같았다. 너무도 마음은 복잡한데 누구한테 막 털어놓을 수도 없고, 그래서 퇴사 통보를 받은 날 퇴근하고 무작정 나도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를 발 닿는대로 걷고 또 걸었던 기억이 난다. 제일 내 자존심이 무너졌던 것은 내가 그만두겠다고 한 게 아니고 회사가 퇴사를 권고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퇴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퇴사를 유도하는 듯한 회사의 태도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엄청나게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병이 난 원인에 제일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제는 후회해봤자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였겠지 라는 생각을 하고 그냥 더 이상 생각을 안하려고 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회사 생활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퇴사 결정이 정해지고 그 즈음에 부장님이 나를 따로 불러내서 하셨던 얘기가 떠오른다. 너는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거라고. 그 때는 부장님이 그런 얘기를 해주시는 것이 오히려 화가 나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회사에 오래 있고 싶은데 그냥 나가라는 말처럼 들려서.
하긴 지금 아무리 곱씹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죽음을 옆에 두고 있다 보니 이렇게 되고 보니까 이 상황 앞에서는 아무 일도 중요한 일이 없고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일하면서 느꼈던 보람, 좋았던 기억들, 힘들었지만 좋았던 순간들은 병을 진단 받은 그 순간부터 다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정기적으로 뵙고 있는 종양내과 교수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던 것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 “암”이란 단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상태는 내 예상보다 제일 안 좋은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그냥 정신도 없고 눈물도 안 나오고 인지가 잘 안됐던 것 같다. TV에서 보면 암 선고 받을 때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현실과 TV는 항상 다르다고 보면 된다. TV에서는 울고 불고 하던데 정작 현실에서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생각도 나질 않고 저 말만은 의사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암”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내 일상의 시계가 동시에 멈추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으로, 아기를 낳고, 또는 좋은 일로 “제 2의 인생”아 시작됐다고 말하곤 하지만 나는 한 순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듣고 싶지도 않았던, 무서운 한 단어인 “암”이라는 말을 주치의 선생님한테 듣게 되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미 죽음의 선고를 받은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내 인생은 암 선고를 받기 전과 받은 후로 나뉘어 버렸다. 평범한 인생을 살거라고 생각한 내가 전혀 내 인생의 시나리오에는 없는 병 진단을 받은 이후의, “제 2의 인생”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