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지 않는 건 살지 않는 것

산책하기

by Rumina

나는 자주 버티었다.

‘살지 않고 버티고 있구나’ 알게 된 후에도 습관은 깊게 남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여전히 살지 않고 있다.

퇴근을 바라보며 하루를 버티고, 주말을 바라보며 평일을 버틴다.

급여 일을 바라보며 한 달을 버티고, 막연한 좋은 날을 바라며 무수히 많은 날을 그저 버틴다.

살지 않는 삶이라니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생각은 늘 과거나 미래로 흩어진다.

가상의 적을 만들어 싸우고, 과거의 말과 행동을 변명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저런 계획을 수도 없이 세우고 허문다.

생각 안에서 일어나는 일 만으로 하루가 꽉 찬다. 정작 해야 할 일들은 뒤로 미뤄진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렇게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삶을 챙기고 존재를 느낀다면 허무함은 자리하지 못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놓친 시간들은 허무함을,

현재에 충실한 시간들은 확장된 존재와 삶을 돌려준다.

작은 일이라도 삶을 챙기는 일은 중요하다.


일과 중 산책을 한다. 가끔은 귀찮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간을 놓친 날은 영 살지 않은 것 같다.

나에게 산책은 삶에 대한 정성, 예의 같은 것이다.

내가 나에게 ‘나를 잊지 않고 있다’ 말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다고, 삶을 놓지 않고 있다고 가져온 옛 체질을 향해 표현하는 작은 의식이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걷는다면 여전히 살지 않는 것이다.

다른 모양으로 버티는 것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올라오는 생각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산책이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땅의 감촉과 피부에 닿는 공기를 느끼는 것이 산책이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하늘을 보는 것이다.

때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으로 인사하는 것이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을 마음으로 축복한다.

특히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는데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 날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분에게 마음으로 ‘좋아요’를 보내주었다.

예전 같으면 좋게 보이지 않았을 차림새였지만 나와 다르기에 멋져 보였다.


그때 문득 ‘거대한 보물 창고가 있구나’ 생각되었다.

무한한 축복과 사랑, 감사가 가득한 곳이다. 하지만 찾는 이가 드물다.

꺼내어 일상에 펼쳐 놓으면 실재가 되는 것들이 가득 있다.

그곳에서 보물을 꺼내 오는 방법은 말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의 부정적인 면을 먼저 인식한다.

나와 다른 점을 상대의 잘못된 점, 모자란 점으로 여긴다.

반대로 비슷한 부분이 많은 사람을 안전하게 느낀다.

자신 이외의 영역은 알 수 없기에 공격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명확해야 편안해진다.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확신하고 싸우는 이유 중 하나이다.


문명이 발달하기 전 야생을 살아야 했던 인류에겐 늘 위험이 가까이 있었다.

낯선 상황과 대상에게 공격받고 생명을 빼앗기는 일이 허다했다.

의심이 많고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는 사람의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

생존에 유리한 정보는 DNA에 각인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이제 우리는 문명 안에 살고 법의 보호를 받는다.

야만의 시대를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 교양과 지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이다.


외부의 환경은 바뀌었는데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원시의 정글 헤맨다.

여전히 위험은 존재한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과도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은 낭비이다.

늘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삶은 원시인의 것이다.

공격과 방어로 구분된 세상에서는 긴장과 불안 밖에 없다.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삶이 없다.


걸어 나와 값 없이 주어진 풍경을 보고, 같은 하늘 아래를 걷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일상에서 챙겨가는 존재하는 일이다.

현재를 걸으며 삶을 삶으로 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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