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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춘희 Sep 08. 2023

난민

영화 '가버나움'



영화는 위대한 감정을 제공한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이 영화를 촬영하고자 실제 시리아 난민으로 레바논 베이루트 빈민가에 살고 있는  '자인'이라는 아이를 주인공 배우로  등장시킨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 주인공 자인은 실제 삶 속에서 나온 표정과 몸짓으로 주연 배우 역을 멋지게 해치운다.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난민'이라는 단어를 소리 내서 읽어보지 않았다


 어쩌다  영화를 보고자 맘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책을 읽는 중 어떤 작가가 언급한 영화 중의 하나였으리라.


브런치 식탁에 글 요리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었다. 7,8월 폭염을 핑계로 글 요리 휴가를 선언한 후 나는 종종 영화를 본다. 늦은 밤 깔끔한 소파에  몸을 묻고 넷플리스의 '가버나움'을 열었다.


뜻하지 않게 잘 건드려지지 않았던 감정이 치고 올랐다. 뜨거워진 가슴 위에 깊은숨을 몰아쉬다 눈물이 흐른다




영화는 ' 부모를 고발한다'로 시작한다. 자인의 부모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기까지의 여정이 전개된다


뜨거워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촌에 부모를 고발하고 싶은 자식이 자인뿐이겠는가?


자인 ~~

누추하면서 절박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빳빳한 심장으로 고개를 들고 견뎌내고 버티느라 , 어린 자인이 여기저기 치이고 박히고 넘어진다. 고통스럽지만 때론 무표정하게, 넘치는 슬픔과 분노가 혼재된 눈빛의 자인이 화면 내내 흐른다.  


자인이네 가족은 시리아 난민으로 레바논 베이르투 빈민촌에 정착한 대가족이다.

자인을 출생신고 조차 하지 않고 부모는 줄줄이 사탕 엮듯이 자인의 밑으로 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방이라고 할 수 없는 누추한 한 공간에  아홉 명의 가족이 너부러진 일상을 산다.  한쪽 천을 치고 자인의 부모는 여전히 아이를 만든다. 피임약, 콘돔 살 돈은 없다. 질외사정이나 배란기를 피하는 피임을 하지 않는다.


무책임한 부모 밑에 자인과 여섯 명의 자녀들이 난민으로 사는 가난한 일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법정에 선 자인엄마 ' 내 처지가 안 되어본 사람은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라고 항변한다. 최소한 아이를 만들지 말어야 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엄마가 할 대사는 아니지 않을까? 


끼니가 없어 아이들은 맹물에 설탕을 타서 돌려 먹는다. 자인이 대가족은 가스통 나르기, 거리에서 컵 주스 팔기 등 어린 자인의 노동으로 먹고 산다. 학교에 보내달라는 자인의 요청은 무능력한 아버지에 의해 폭력으로 무마된다.


 어린 자인은 말한다.' 사는 게 개똥 같다. 내 신발보다 못하다고'...


여동생 사하르가 11세 생리를 시작하자 부모는 입하나 줄이고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고자 나이 많은 남자에게 결혼을 강요한다. 인공지능이 진화하는 이 시대에 기가 찰 노릇이다. 자인은 동생 사하르를 지키려 격렬하게 저항한다. 부모는 폭력으로 자인을 저지하고 동생 사하르를 지키지 못해 무기력해진 자인은 집을 떠난다.


집을 떠나는 길에 자인은 에티오피아 불법 이주민으로  따뜻하고 인정 많은 라힐을 만난다. 일 하러 가는 라힐이 없는 동안 세 살 라힐의 아들 요나스를 맡아 돌본다.


자인은 적응력이 뛰어나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빠르다. 헤어날 수 없는 상황에도 요나스를 향한 따뜻한 인간애를 잃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개똥 같은 삶을 버리지 않는다.



불법 체류자 라힐이 당국에 잡혀 나타나지 않자 또 다른 삶의 고난 속에서 자인이 요나스를 돌보느라 애쓰는 장면 장면들이 눈물겹다.  자인의 인간애가 장면마다 넘쳐흐른다.


자인이 창문너머 라힐의 옆집 TV 만화룰 창문에 매달려 보다, 창살에 거울을 끼워 요나스를 무릎에 안고 함께 본다. 누추한 라힐이 집이 환해지는 아름 다운 장면이다. 




동생 사하르가 임신을 했고 도중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자인은 나이 많은 사하르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이려 달려간다. 자인은 잡히고 갇힌다. 갇힌 유치장 TV에서 자인은 우연히 아동인권에 대한 방송을 보다 전화를 걸어 생방송으로 자신이 지내온 실상을 알린다. 아동인권 자원변호사가 자인을 찾아왔고 자인부모와 사하르 남편이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선다.


 '부모를 고발한다 나를 낳게 해서' 자인이 부모를 고발했다.


재판 도중 판사는 자인  엄마의 임신 사실을 확인했고  엄마는 사하르를 데려간 대신 신이 새로운 아이를 주셨다고 한다. 자인은  엄마에게 사하르가 죽은 게 슬프지 않냐고 눈물을 글썽이며 묻는다. 그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옳다고 소리친다.


어린 자인 고통을 너머 부조리하고 헤어날 수 없는 가난, 부당한 노동과 부모의 학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비루한 일상에 저항하고 , 끈질긴 생명력을 잃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한다.

나는 영화 내내 어린 자인의 치열한 몸짓에서  온몸으로 지켜내려는 실존의 존엄성을 본다.  


영화의 마지막에 신분증에 들어갈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자인은  웃는다.

한줄기 빛을 염원하며 미소 짓는 자인.  자인의 눈빛에 내 눈을 맞춘다.


영화 내내  분노에 빛나는 자인의 눈빛이 뇌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늦은 밤 유우엔 난민 기구의  난민을 돕는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덧 붙이는 군더더기 글 -


얼마 전 나는 잠깐 '정서적 난민'으로 있었다.


작가들에게 수익을 창출해 주고자 발표한 브런치스토리팀의 정책을 읽었다. 작가들의 댓글들에서 '난민'의 정서가 읽히기도 했다.


작가 이름에 초록색 배지가 달린 작가와 없는 작가가 나뉘고 , 깃발이 하나 더 추가돼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작가가 등장했다.


능력과 효능에 따라 인간을 평가하고 돈이라는 자본을 차등분배하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무엇을 하든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IT, AI 진화가 우리 인간의 삶 편리성이 극대화되고 있다. 기술 혁신이 자본주의의 특징과 결합되기 시작하면서 ' 나 다움'으로 살아가기가 간단치가 않다.


나는 아침 겸 점심을 느긋하게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브런치'라는 이름이 좋았다. 나를 지나치게 소모하거나 훼손시키지 않고 글 요리를 만들어 브런치 식탁에 올리고 싶을 때 올리는 자유로움을 즐겼다. 

계속 그럴 것이다.


 브런치팀에서 무엇을 하든 간에 '자인'처럼 '나 다움'으로 나의 실존에 의미를 움켜쥐고 여전한 마음으로 글요리를 만들까 한다. 다만 이 상황이 나 다움을 잃지 않고 묵묵히 삶을 마주한 하듯 종종 다짐을 하며 글을 써야 하는 게 ㅡ강요당하는 듯해 부자연스럽긴 하다.


브런치 스토리 팀의 새로운 시도는 수익을 창출되는-수익을  원하는 작가에게 기쁜 소식이다.

한편 기술의 혁신  AI-쳇Gpt ,등장이 진화로 하는  지금, 작가의 순도 100%의 글을  독자에게 제공되는 게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은 있다.


지구의 한쪽에선 인공지능이 인간의 세계를 지배할 날이 올 것처럼 난리치고  다른 쪽에선 끊임없는 전쟁에 밀려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정서적 난민' , '물리적 난민' 어느 것 하나도 우리는 자유로울 없는 시대에 존재한다. 물리적 난민의 가난한 일상에 인간성이 파괴되는 만큼이나 기술의 혁신 시대 우리도 위험한 지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나 다움'에 '내 이름'을 거는 일에 열심을 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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