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붉은여우의 은빛 눈동자

시 쓰는 여행가

by 지유



북해도에 눈이 오면 붉은여우가 마을로

내려오는 상상을 합니다

차창 밖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 자작나무의

눈부신 몸통을 오래도록

바라봤지요


눈 쌓인 자작나무 숲에 서면

여우의 눈을 닮은 옹이마다

떠오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죽순처럼

돋아납니다


도로까지 내려온 사슴과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서로 그윽이 바라보다

사슴은 풀숲에 무심한 얼굴을 묻었고

나는 천천히 유황이 흐르는 냇가를 걸어왔지요


우리는 각자 공기 속으로 흩어졌지만

자작나무 군락과 사슴이 세상의

숨을 멎게 하던 짧은 그

순간에


어느 생의 한 토막이 불려 와

나는 삽작 아래 쌓인 눈을 쓸며

길을 내고 있더랍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나는 사라지고

옹이 속 얼굴에 말을 걸 수 있을까요

그 얼굴을 두고 돌아올 수 있을까요


길을 가르던 바람이 손을 내리면

눈보다 더 흰 자작나무 숲

에서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의 눈시울은 왜 따뜻한가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