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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에 소원을 빌던 밤

여행에세이

by 지유

대성리역을 지날 때였다.

“중3 때 청량리역에서 기차 타고 대성리 왔던 거 생각나니? 여긴 그대로네.”


“그러게! 그때 같이 왔던 P나 L은 어떻게 지낼까?”


“생각해 보니 중학생인데 청량리역에서 기차 타고 여기까지 왔었네. 우리 제법 용감했었다.”


“우리가 좀 새가슴이었냐? 가방 검사하다 캔디 만화책이 나와서 담임한테 혼이라도 나면 종일 기분이 안 좋았잖아.”


“다행히 우리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잘 컸다. 아니 잘 늙었네. 하하"


운전하던 나와 옆자리에 앉은 J는 함께 웃었다. 잘 늙은 여자 둘이서 가평 자라섬캠핑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J와는 여중 3학년 때 같은 반 짝으로 만났다. 그때 우리는 둘 다 마르고 또래들보다 키가 컸다. 짧은 단발머리에 헐렁한 교복을 입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소녀라기보다는 키만 큰 선머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서 가까운 J의 집으로 곧장 달려갔었다. 그녀 방의 노란색 장판이 까맣게 눌은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만화책을 보거나 라디오나 카세트의 노래를 들으며 놀았다. J의 어머니는 내성적인 딸에게 활발한 친구가 생겨서 좋으시다며 항상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J의 어머니가 한 솥 가득 라면을 끓여주시거나 카레밥을 해주시면, 한창 클 나이의 우리는 동그랗고 꽃무늬가 그려진 알루미늄 밥상에 머리를 맞대고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었었다.


형제가 많은 우리 집에서는 친구가 오면 각자 알아서 친구를 직접 대접해야 했다. 냉장고나 찬장을 뒤져 삶은 고구마나 누룽지를 친구에게 주는 정도였다. J의 집에 가면 언제나 극진하게 밥상을 차려주는 그녀의 어머니 덕분에 더 자주 갔었다. 여섯 남매의 중간이라 이리저리 치인다고 생각하다가도, 그 친구 집에서는 융숭하게 대접받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 기억으로 내 집에 오는 손님에게 정성껏 대접하는 법을 배웠다.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서도 가끔 J 어머니의 집밥이 그리웠다.


여고를 졸업하자 J는 바로 은행에 취업했었고 대학에 들어간 나는 가끔 그녀를 만나러 은행 앞으로 갔었다. 마지막 1원까지 시재가 맞아야 퇴근을 하는 그녀를 기다렸다가, 돈가스나 함박정식을 함께 먹었다. 내가 학생신분을 벗어날 때까지 그녀는 기꺼이 밥값을 냈었다. 나는 그게 늘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게 되자, 우리는 퇴근 후에 모여 한 번씩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었다. 처음 겪는 사회생활과 말단 사원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서로 직장생활을 응원했었다.


그렇게 서로 다독거리던 45년은 한 줄로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면서 수많은 이야기가 함축된 숫자이다. 어느 날에는 혼자 하는 사랑을 술로 달래느라 급하게 취했었고 힘겨운 토악질에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던 우리였다. 서로의 첫사랑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유치하고도 서툰 감정도 응원해 주던 친구사이다. 슬픈 일이 생기면 같이 가슴이 찢어지고 기쁜 일에는 본인보다 더 기뻐해 주며 오랜 벗이 되었다. 45년을 그리 나이 들어가다 보니 세월의 주름처럼 깊이 고인 친밀감이 남아있었다.


돌아보니, 한때 그토록 간절히 열망하던 사랑은 이제 기억도 희미해져서 그때 왜 그리 심각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쩌다 사소한 이유로 토라져서 몇 달씩 연락이 없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만나기도 했었다. 시간이 흐르며 많은 이야기가 잊히고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모래바람이 지나간 다음에야 드러나는 사막의 바위처럼 J와 나는 결국 친구로 남았다. 인연이 깊은지 봄에 그녀의 딸 친구와 나의 아들이 결혼을 하면서, 우리는 마치 사이좋은 사돈지간처럼 지내게 되었다.



상류의 끝은 시원이고, 하류의 끝은 소멸이다. 물은 시원에서 상류 사이를 잇대어 흐른다.


-중략 –


젊은 날에는 늘 새벽의 상류 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이제는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류의 저녁 무렵이 궁금하다.


김훈 < 자전거 기행 1 > 중에서. 문학동네. 2014.



우리는 어느덧 삶의 이야기가 늘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건 아님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오래 구른 바퀴가 낡아 삐걱거리듯 여기저기 아픈 곳도 늘어가는 중이다. 게다가 J와 나는 최근에는 두 달 간격으로 서로의 어머니를 잃으며 더욱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둘이 만나면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다가 어느새 어머니에게 못했던 말을 서로에게 들려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그런 친구와 캠핑장이란 데를 가게 되었으니, 중학교 때 코펠과 버너를 들고 대성리로 놀러 갈 때처럼 살짝 설레기도 했다. 가족을 위해 장을 보던 두 명의 주부는 마트에 들러 와인과 멜론, 두툼한 삼겹살 등 우리만을 위한 조촐한 장을 봐서 자라섬으로 향했다.


자라섬 캠핑장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꽃축제를 준비 중인 섬을 돌았다. 모래톱처럼 생겨난 섬이 꽃밭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섬을 가로지른 철로 위로, 한 번씩 기차가 지나는 풍경이 왠지 낭만적이었다. 도시와는 사뭇 다른 투명하고 시린 공기가 캠핑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장작을 사다가 캠핑카 옆에 놓인 바비큐 기구에 불을 피웠다. 부채질해 가며 열심히 숯불을 피우다 문득, 불을 피우고 거기에 장작을 더하며 불을 지키는 일은 마음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은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게 버거워 다 놓고 싶은 순간에도 한 줌 불씨를 뿌려 희망을 되살리는 일이나, 뜨겁게 타오르던 불빛이 저물며 한 줌의 재로 사그라지는 것 또한 사람의 일을 닮았다고 느꼈다.


춤추듯 바람에 떨어진 떡갈나무잎과 거미줄을 타고 내려온 거미가 밤이슬에 젖는 시간, 밤에 느껴지는 감각은 낮의 느낌과는 달랐다. 적당한 습기가 콧속을 촉촉하게 열어줘서 어떤 냄새도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작은 소리에도 귀가 예민하게 열렸다. 낙엽들이 구르며 수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밤의 공기를 뚫고 나온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밤늦도록 캠핑카 옆에서 장작을 태우며 도심에서 잘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었다. 별말도 없이, 타닥타닥 장작이 타면서 갈라지는 소리와 추임새처럼 들려오는 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족들 틈에서 늘 분주한 일상에 젖어있던 두 여자는 장작 타는 냄새를 맡으며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적당히 여유로웠다. 매일 이렇듯 평온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깐 했다.


“우리 더 나이 들면 어떻게 변할까 궁금하지 않니?” “지금보다 눈은 작아지고 팔자 주름은 더 깊어지겠지. 뱃살 처지는 건 어쩔 수 없고, 너무 오래 살아서 아이들한테 짐이나 안되면 좋겠다.”


낮에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라섬을 산책하다가 섬의 유래를 찾아보았다. 자라섬은 섬을 마주한 두 산봉우리가, 자라 형상을 하고 있어 자라섬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고, 상공에서 섬을 바라보면 섬의 생김새가 자라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강물을 따라 흘러온 흙과 모래가 강 한가운데에 섬을 이루었듯이, 우리 삶의 흔적도 쌓여 어딘가에 섬으로 남지 않을까. 우리는 각자 어떤 모양의 섬으로 남을까 궁금해졌다. 우리 생도 너무 빠르지는 않게, 물살에 순응하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선머슴 같던 소녀들은 이제 노화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생각하게 되었다. “힘든 일은 견딜 만큼만 오고, 앞으로는 좋은 기억만 쌓이면 좋겠어.” “그러게. 아이들도 무탈하게 살았으면 좋겠고. 우리도 아프지 않았으면.” 이겨내지 못할 아픔이나 견디지 못할 슬픔은 물처럼 지나가라고, 이따금 들리는 강물 소리에 빌었다. 거센 물살 같은 시간에 떠밀리듯 정신없이 살아온 두 여자는, 집에 두고 온 식구들과 함께 곁에 있는 친구를 위해서 기도했다. 밤 깊은 자라섬을 다독이듯 소박하지만 이루기 쉽지 않은 소원을 빌었다. 점점 늙어가는 마당에 아프지 않기는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빌었다. 밤사이 우리의 바람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면서, 잠을 청했다. 소원에 응답이라도 하듯 푸른색 융단을 두른 하늘에 반짝거리는 별이 깜빡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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