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여행기 #2 : 7대 불가사의, 페트라(Petra)
a rose-red city... half as old as time.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밋빛처럼 붉은 도시
-John William Burgon-
어쩌다 내가 페트라를...
해외 배낭 여행자들이 숙소나 식당에서 서로 만나면 어디가 좋았다, 여기를 가봐라 등 자신들이 다녔던 여행지들을 추천할 때가 많다. 처음에 페트라에 대해 들었을 때는 그런 곳이 있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다 한 번, 두 번, 세 번... 꼭 가봐야 할 곳으로 페트라가 자주 언급되었다.
페트라? 배낭여행 골수파들이나 찾아가는 그곳을 설마 내가 가 보겠어? 그곳이 어느 나라에 있는 지도 인식하려 하지 않고 페트라를 잊었었다. 그런데, 그 페트라가 바로 요르단에 있었다. 남들은 페트라를 가기 위해 요르단에 왔을 텐데 나는 요르단에 와서 얼떨결에 페트라에 가게 된 셈이었다.
페트라, 알고 봤더니...
페트라도 모르면서 어떻게 해외 배낭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냐고 할 정도로 페트라는 '세계 7대 불가사의' 또는 '살아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꼽히는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여행지였다. 여기까지 온 김에 페트라를 확실하게 보기로 마음먹고 3일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입장권을 손에 쥐었다.
DAY 1 : [1부] 열려라 참깨! 페트라가 열리다
기념품 가게도 즐비하고, 카페도 있고, 호텔까지 갖추고 있는 페트라 입구를 지나면 금방 페트라가 나올 줄 았았다. 그런데, 이런 황량한 길을 한참 걸어가서야
협곡을 가리키는 작은 화살표가 나타났고
웅장한 암벽들 사이로 보이는 좁은 길목에 도착하였다.
사람이 깨알처럼 보이는 거대한 이 공간에 특별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는데 고대 로마시대 군복쯤으로 보이는 의상을 입고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파수꾼들이 횡대로 서 있었다.
이 곳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주려는 의도가 느껴지긴 했지만 열대여섯 명 남짓한 등장인물로 연출하기에는 뭔가 역부족해 보였다.
파수꾼들의 횡렬을 지나 협곡에 들어서자 양 옆으로 두 명의 파수꾼이 지키고 있었다. 거대한 암벽들과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어울려져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영화 세트장에 들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페트라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1989), 트랜스포머-패자의 역습(2009)의 촬영지도로 유명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저 거대한 암벽들로 가득 찬 사막의 땅이 페트라인가?'라고 생각하며 뭔가에 빨려 들듯 협곡으로 들어섰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곧게 올라간 암벽들이 이루어내는, 좁은 듯 넓어지고 넓은 듯 좁아지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놀라운 광경들이 펼쳐졌는데, 규모로 보면 분명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사암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과 자연스러운 결 덕분에 가벼운 산책을 하듯 여유롭게 협곡 사이를 지나갈 수 있었다.
암벽에 있는 선들이 그저 자연이 이루어 낸 굴곡이라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암벽 곳곳에 조각의 흔적이 보이기도 했다. 바람과 비를 이겨내지 못하고 점점 사라져가는 모습이 역력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들이 빠져나가 듯 아스라이 사라지는 조각의 흔적들을 보며 세월의 노곤함과 허무함을 느끼기도 했다.
여기까지도 충분히 놀라웠는데 협곡의 막바지에 얼핏 보이는 거대한 구조물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지기 시작했다. '열려라 참깨!'를 외치면 보물을 숨겨둔 동굴이 열리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문이 열리듯 공간이 넓어지더니 기상천외한 건축물이 나타났다.
아래에서부터 뼈대를 세우고 벽을 쌓아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암벽을 깎고 안으로 파고들며 만들어 암벽과 일체가 되어있는 건축물이었다.
페트라는 기원전 4세기 경에 아라비아반도에 정착한 유목민족인 나바테아인의 중심 도시였다. 19세기 초에 베일을 벗고 그 모습을 드러냈지만 아직까지도 일부만 발굴이 이루어져 여전히 미스터리로 가득 찬 곳이다. 현재는 베두인족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낙타나 말을 태워주거나 기념품을 팔며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페트라는 눈길 가는 곳, 발길 닿는 곳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처음에 진입했던 협곡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높은 암벽으로 둘러싸여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던 좁은 협곡은 지구 속 은밀한 곳에 있는 블랙홀 입구 같았다고나 할까?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시공간의 축을 넘어 또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 수 세기 전에 이룩해 놓은 신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현재로서는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무덤도 있었고, 신전도 있었고, 야외극장, 상수도 시설까지도 갖추었던 완벽한 도시였다. 곡식 한 알 키우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인간이 세운 업적이라기보다 신의 손길이 닿았다고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거대 도시가 '조각'될 수 있었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를 만들었을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궁금증을 떠올리며 페트라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카메라, 스마트 폰 등 각종 디지털 장비들을 총동원하여 페트라를 겨우 담아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페트라는 침묵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명은 발전하지 않았다고, 단지 변화했을 뿐이라고.
DAY 1 : [2부] 밤의 페트라, 불꽃 장미를 태우다
페트라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협곡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치 '열려라 참깨' 암호에 맞추어 열린 것 같았던 카즈네피라움 광장을 지나 협곡으로 다시 들어가려 할 때
페트라의 베두인들이 불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밤이 되니 불을 피우는 유목민들의 모습이려니 생각했다. 이 작은 불꽃의 정체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협곡을 지나자 시공간의 축이 다시 움직였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가는 가족의 뒷모습을 보니 저 쪽 시공간에서 느꼈던 경이로움보다 이 쪽 시공간에서 느끼는 인간다움이 그래도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페트라를 빠져나와 입구의 마을에 닿으니 어느새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불빛 하나하나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따뜻한 저녁이 차려진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있을 가족들의 불빛일 터였다. 웃음과 사랑을 품고 보석처럼 빛나는 이 불빛들 또한 경이롭지 아니한가!
마을로 돌아가 저녁을 든든히 먹고는 숙소에서 두터운 옷으로 재무장을 하였다. 페트라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페트라는 다시 문을 열었다. 흔히 할 수 있는 상상으로 화려한 조명을 받은 페트라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려보며 다시 페트라를 찾았다.
어둠의 장막 속에서 페트라의 공기는 금세 온기를 잃어버렸고 풀 한 포기 지탱하기 벅찬 거친 땅과 암벽은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협곡에 들어서자 내 상상력이 얼마나 얄팍했는지 곧 깨달았다.
인공적인 조명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앞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의 친절을 가진 희미한 가로등조차 없었다. 앞사람의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꽃 등의 행렬만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었다. 당연히 꼬마전구가 꼽혀 있으리라 생각하며 불꽃 등을 살펴보았다. 역시 얄팍한 상상이었다.
종이봉투에 모래를 깔고 작은 양초를 세워서 만든 촛불 등이었다. 붉은 불꽃을 품고 있는 종이봉투의 모양새가 장미꽃 한 송이 같았다. 촛불이 움직이는 동작에 따라 등불이 흔들렸고 이는 마치 봄바람에 꽃봉오리가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페트라의 밤을 장식하고 있는 이 등을 '불꽃 장미'라 불러보았다.
불꽃 장미 한 송이 한 송이를 따라 협곡을 지나자 카즈네피라움 광장에 불꽃 장미 밭이 펼쳐져 있었고 함성이 절로 나왔다. 낮의 페트라를 뒤로 하고 밖으로 갈 때 이 광장에서 보았던 작은 불꽃이 떠올랐다. 날이 어두워지고 추워지니 불을 피우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 작은 불꽃이 바로 이 불꽃 장미들의 씨앗이었던 셈이다.
페트라를 지키는 베두인들이 씨앗을 심듯 양초를 꽂고, 물을 주듯 불꽃을 붙여 불꽃 장미 한 송이 한 송이를 틔워낸 것이다.
불꽃 장미들로 빛나는 광장에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두꺼운 천이 깔려 있었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노랫소리와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기도 소리처럼 들리는 뜻을 알 수 없는 노래였지만 성스러운 가락을 따라 검은 하늘이 내려앉았고 불꽃 장미는 어느새 별이 되었다. 하늘에 떠 있던 신들이 밤을 타고 내려와 인간들과 어울리는 은밀함이 느껴지는 신비한 밤이었다.
DAY 2 : 페트라의 속살을 보다
'두 번째 찾아가는 페트라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을 하며 다음날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페트라의 문을 두드렸다. 어제는 망원경을 들고 페트라를 찾았다면 오늘은 돋보기를 들고 페트라를 찾은 느낌이었다. 이름 없이 흩어져 있는 구조물들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고 천덕꾸러기처럼 덩그러니 앉아 있는 바위에 눈길이 갔다.
특히 암석의 색깔과 무늬에 눈길이 끌렸다. 멀리서 보기에는 단순하게 붉은색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암석마다 각기 다른 색들이 섞여 독특한 무늬를 자아내고 있었다.
인체의 신비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사람의 골격 같은 무늬도 있었고, 동물 근육의 결을 연상케 하는 무늬도 있었다. 암벽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숨어있던 새로운 무늬들이 속속 나타났다. 마블링이 좋은 소고기를 얇게 썰어 놓은 것 같은 무늬도 보였고 냉동실에서 갓 꺼낸 참치살을 썰어 놓은 것 같은 무늬도 보였다.
사람의 지문처럼 어느 하나 똑같은 무늬는 없었다. 수많은 결을 따라 수 천년의 비밀이 숨어 있는 같았다. 한 결에는 나바테아인들의 숨결이, 한 결에는 로마인들의 숨결이, 한 결에는 베두인들의 숨결이...
어제 채 둘러보지 못한 곳들을 둘러보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여행자의 욕심을 내려놓고 한걸음 물러나 방랑자의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페트라의 경치를 조망할 있는 곳에 아담한 카페가 있었다. 그곳에서 차와 커피를 마시며 페트라의 햇살과 바람을 만끽했다.
그리고 페트라에게 궁금증을 띄워보았다.
이 햇살과 바람을 따라
또 어떤 결들이 페트라에 새겨질까?
또 다른 수천 년이 지난 후에
그 결들은 어떤 무늬로 나타날까?
페트라여, 영원하라!
요르단 페트라에서
행복여행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