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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Im May 23. 2021

밥과 김치에 진심인 사람들

"아니, 혼자 있으면 먹을 건 좀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 한국인들은 정말 밥에 진심이다. 


일을 할 때도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우리 일단 점심 먹고 와서 다시 생각해봅시다." 

"오늘 야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맛있는 거 먹고 올까? 막내는 뭐 먹고 싶어?"


친구를 만날 때도 "넌 요즘 당기는 거 없어? 성수동에 이번에 ~맛집이 새로 생겼는데 어때? 거기서 볼까?"


독립해서 자취를 시작했다 하면 새로운 동네의 보안이나 (금세 더러워질게 뻔한) 집 청소를 걱정하는 사람은 드물고 "어머, 요리는 좀 해?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지? 밑반찬 좀 나눠줄까?" 라며 걱정한다.


여행을 갈 때도 주요 관광지를 우선 대충 추려놓고, 그 주변 맛집과 카페 리뷰를 꼼꼼히 읽는다. "국내 여행은 먹방이지!" 라며 숙소-> 관광지-> 맛집-> 카페의 효율적이고도 아름다운 이동 동선을 보며 뿌듯해한다.




뭐, 큰 호불호 없이 그저 허기를 면하는 정도면 된다는 입 짧은 사람, 외국인들처럼 간단한 샌드위치와 함께 워킹 런치를 하는 직장인, 만나는 사람이 좋으면 다 맛있는 거라는 낭만적인 친구,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새로운 곳을 발견하는 게 더 즐겁다는 이도 있지만, 나는 그런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 한~참 멀다.


대기업에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영업을 하셨던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맛집이란 맛집은 참 많이도 다녔더랬다. 거기에 해외에서 10년 동안 살았던 덕에 온갖 독한(?) 향신료에도 면역력이 생겨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는 것에 겁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요리를 좋아하는 남동생 (a.k.a.임도비 혹은 임쉪) 이 차리는 다양한 장르의 음식 앞에서 맛있다 맛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함께 수다 떠는 주말의 저녁시간을 참 사랑했다. 


그 결과, 엄마 표현에 따르면 입이 다져졌다. (맛있는 걸 좋아하고 기준치가 높다는 뜻. 어느 지역 사투리일까? 아님 그냥 엄마만의 표현일지도.) 




그렇게 입이 다져진(?) 나는 왠지 모르게 '남해' 두 글자에 꽂혀 하룻밤 만에 한 달 살기를 위한 모든 검색과 준비를 마치고 나서 뭔가 쎄-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축적돼 온 먹방러의 빅데이터가 말하길)
아... 남해엔 멸치쌈밥 빼면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전주 하면 비빔밥, 통영 하면 굴, 여수 하면 게장, 이렇듯 남해엔 멸치. 에이... 그래도 다 사람 사는 곳인데 가면 괜찮은데 있겠지. 있는 동안 현지분들한테 추천받으면 되지 뭐. 숙소 근처엔 지방에서 필수라는 하나로마트도 엄청 가까워!!!!


결론부터 얘기하면, 남해 인스타 맛집은 (예상했다시피) 감성용이고, 현지 식당은 일부러 찾아가 먹을 만큼 크게 맛있는지 모르겠고, 기대를 걸었던 하나로마트 마저 구비해둔 물품 종류가 현저히 적었다. 지난 10년간 열심히 다닌 국내외 여행지 중에 음식에 대한 기대가 이렇게까지 떨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가 "쉽게 상하는거 아니니까 오이지 무친 것 좀 챙겨가~"라고 할 때 들고 올걸. 귀찮아서 두고 온 오이지가 눈앞에서 아른거릴 줄이야...




하루는 숙소 사장님께 "사장님~ 왜 편의점이랑 마트에 살게 없어요?"라고 징징대며 급히 마켓 컬리로 택배 주문을 넣어놓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한동안 유행해온 레트로 감성이 아니라 수십 년간 영업해온 찐 레트로 가정식 백반집이라는 곳에.


두시를 이미 넘긴 애매한 시간이라 혼자 열심히 살짝 튀겨진 듯한 가자미구이를 발라먹고 있는데, 주방에서 사모님이 나오셔서 '손님~ 뭐 모자란 거 없어요?'라고 말을 거셨다.


"생선도 맛있고 반찬도 다 맛있어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내 수다쟁이 바이브를 감지하신 건지 맞은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시고는 본격 인터뷰를 시작하셨다. (어르신들 전혀 어려워하지 않고 수다 떠는 거 좋아하는 1인)


다랭이 마을 출신으로 타지에서 지낸 5년을 제외하면 평생을 고향인 남해에서 보내시며, 20년 넘게 이 식당을 운영 중이라는 58년 개띠 사모님은 혼자 차 끌고 서울에서부터 한 달 살기 하러 왔다는 말에 기함하셨다. 


"아니, 혼자 있으면 먹을 건 있어요? 김치 좀 싸줄까? 겉절이 어때 겉절이!"라고 크게 김치를 외치셨다. 


여긴 젊은이들은 읍내 나가서 먹고, 인스타 맛집은 비싸기만 하고 째~깐한거 주며, 어르신들은 밭에서 길러 자급자족한다며.


"괜찮아요~ 여기 와서 먹으면 되죠. 생선구이 맛있어서 저 또 올 거예요"라고 손사래를 치며 여러 번 실랑이 끝에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나오기 전에 사장님, 사모님, 그리고 둘째 아드님에게 모두 인사함)




또 다른 날은, 숙소 근처 편의점 언니 (라고 쓰고 한참 동생이라고 읽는다) 에게 "맛있는 거 먹고 싶으면 어디 가서 드세요? 왜 여긴 멸치밖에 없나요?ㅠㅠ " 했더니 남해의 모든 것은 읍내에 나가야 있다고 했다. 그녀가 알려준 맛집 두어 군데와 큰 마트를 저장하고, 2일과 7일마다 열린다는 오일장도 구경할 겸 전통시장이 있는 읍내로 나갔다.


어디선가 리뷰를 본 것 같은 낯익은 반찬가게가 보여서 생각지도 않던 명란젓을 한팩 고르고, "사장님~ 김치는 뭐가 맛있어요?"라고 물었더니 서울에서 내려와 장사 중이라는 남자 사장님은 대답 대신 갑자기 "물김치 좋아하세요?"라고 되물었다.


"익은 거 좋아해요? 아님 생거?" 라며 갑자기 가게 안으로 들어가 큰 냉장고 안에서 김치통을 꺼내시더니, "이거 이번에 어머니가 담그신 건데 동치미 국물에 갓 넣어서 만든 거예요. 한번 드셔 보세요."라고 한 봉지를 퍼주셨다. 


"그리고 남해 맛집은 인스타로 디엠 주시면 제가 몇 군데 추천해드릴게요~"라고 덧붙이며.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40여분 달려 찾아간 전통시장의 좌판에서 할머님께 구매한 백오이와, 명란젓과 물김치를 들고 숙소로 들어오는데, 숙소 사장님이 뜬금없이 "저기 텃밭에 상추 많으니까 맘껏 따다 드세요."라고 말씀하시고 할 일 마저 하러 사라지셨다.


들어와서 부엌 정리를 하는데 갑자기 실소가 터졌다. 부엌에는 전주 숙소에서 여사장님이 챙겨주신 오렌지 하나, 보리암에서 받은 떡과 두유, 지금 숙소 옆방에 머물던 사장님 지인분이 초면에 건네준 바나나 두 개와 허니버터 칩, 그리고 방금 받아온 물김치가 있었다. 


그냥 대충 끼니 때워도 죽지 않는데, (맛있게) 먹고살겠다고 맛집 정보 검색하고 그 먼 곳까지 장 보러 간 나도 참 나다... 싶어서 웃기고, 또 징징대는 나를 챙겨준 이들이 귀여워서 웃었다. 소소하지만 챙겨준 그 마음들이 참 따뜻하고, 서로 짠 것처럼 "아니, 혼자 있으면 먹을 건 있어요?"라고 말할 때 그 걱정 어린 얼굴들이 하나같이 비슷했더랬다.


남해에 맛집이 없는 건 (지금까지는) 맞는 것 같다. 이미 기대치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평소와 달리 크게 아쉽지가 않은 건 처음 보는 이들의 마음 덕분이겠지. 


나만큼이나 밥과 김치에 진심인 분들에게 감사하며 소소한 저녁상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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