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은 들을 수 있는 장르
모처럼 오전에 컨퍼런스 콜이 없는 날이라 후다닥 고양이 세수만 하고 모자를 눌러쓰고 쓰레빠를 끌고 동네 백수마냥 동네 산책을 나섰다. (이상하게도 이럴 땐 슬리퍼가 아닌 쓰레빠라고 해야 느낌이 사는 것 같다.)
습관처럼 에어팟을 끼고 숙소를 나섰는데 노이즈 캔슬링이 되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긴가민가 했다. 작은 몽돌 해변 옆 어촌 동네가 어찌나 조용한지 그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두어 곡 듣고 나서 왠지 거추장스러워 에어팟 한쪽을 빼는 순간, 솨아아아아 파도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소리와 빛에 유난히 예민한 아이 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무뎌졌을 테지만 아직도 남들과 비교하면 그 기준치가 훨씬 높은 것이 사실이다.
워낙 소리에 예민해서 동네 마실은 다들 잠든 밤 열두 시에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하고, 테이블 간 간격이 좁고 시끄러운 음악을 광광 틀어대는 카페나 음식점은 절대 가지 않으며, 평일 낮 애매한 시간대에 아무도 없는 사찰, 미술관, 박물관, 공원을 사랑해 주기적으로 찾아가 힐링한다. 기꺼이 돈을 더 지불하고 소수만을 위한 예약제 공유 오피스와 책방을 애용한다.
서울에서는 집을 나서자마자 들리는 온갖 소음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산책길에 에어팟은 언젠가부터 음악 감상이 아닌 순전히 소음 퇴치용으로 사용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좁은 골목에서 나를 꼭 칠 것처럼 달려오는 차들의 클락션, 재개발 진행 중인 뒷골목의 공사장 소리, 마치 전세 낸 것 마냥 일행과 일렬로 대로를 막고 걸어가며 떠드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섞여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그런데 이곳은 숙소 문을 열고 몇 발자국만 걸으면 새소리, 물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풀소리, 멀리서 캉캉 짖는 동네 귀요미 똥강아지의 소리까지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는 소리들만 들린다.
아... 정말 이 무슨 호사인가. 매일 밤 자기 전 유료 결제한 명상 어플 Calm에 있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힐링된다고, 명상도 좋지만 이 풀벌레 소리만 들어도 돈이 아깝지 않다고 좋아했는데... 남해는 그런 화이트 노이즈도 인위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곳이었다.
숙소의 문을 열면, 옆으로는 금산에서부터 내려온다는 계곡 물소리가 들리고, 길을 하나 건너면 몽돌해변의 파도소리가, 뒤돌아 쭉 길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편백휴양림과 이어진 수많은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일할 때 배경으로 틀어놓은 음악을 흘려듣는 것 말고, 이렇게 오롯이 어떤 소리에 집중해보는 게 얼마만인지. 그리고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고유한 소리 하나하나가 울리는 게 또 얼마만인지. 한 시간 남짓한 동네 마실 시간이 참 감사하고 일하느라 멀리 놀러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까지도 사라져 버렸다.
작년부터 노이즈 캔슬링은 신세계라며 몸에서 떼지 않던 에어팟을 버렸다. 그리고 느꼈다. 다른 수많은 소리처럼 '고요'도 들을 수 있는 하나의 장르라고. 고요함과 여백은 들리는 것이었다.
소음 퇴치용 에어팟은 앞으로 열흘간 더 휴가를 줘야지. 바이 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