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랑] 아빠와 명함

손바닥 크기에다 두께가 A4 용지보다 조금 두껍고 빳빳한 종이, 한 장.

by 봄꽃달

"손바닥 크기에다 두께가 A4용지 보다 조금 두껍고 빳빳한 종이 없나." 아빠가 나에게 물었다. 아빠의 취미는 고장 난 기기를 조립하여 고치는 것이다. 기기를 조립하다 보면 부품 틈 사이에 기름때가 끼기 마련인데, 틈이 너무 좁다 보니 종이 같은 것으로 닦아내야 한다고 한다.


종이가 손바닥 보다 크면 잡기 불편하고, 두께가 얇으면 기름때가 닦이기는커녕 종이가 흐느적 휘어버린다. 그래서 아빠는 손바닥 크기에다 두께가 A4용지 보다 조금 두껍고 빳빳한 종이를 찾아다닌 것이다. 종이야 많지만 막상 원하는 종이를 찾기란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다. 아빠는 시간 날 때 한번 찾아봐달라고 하셨지만, 아빠가 평소에 나에게 무언가 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없어서 빨리 찾아드리고 싶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찰나,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명함이 눈에 띄었다. 내가 신입사원 시절 사용했던 명함이었다. 10년 전에 사용한 명함이라 먼지가 살짝 쌓여있었다. 나는 명함을 한 장 만지작 거리며 아빠가 설명한 내용을 생각해 보았다. 손바닥 크기에... 두께는... ... ... 딱이었다! 나는 당장 아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지난번에 말한 종이, 찾았어요. 제 명함 쓰면 될 것 같은데요? 어차피 신입 때 썼던 거라 이제 못써서."

"좋다.ㅎㅎ"


아빠는 소식을 듣고 신나서 잘 쓰지도 않는 'ㅎㅎ'까지 쓰며 답장해 주었다. 아빠의 신난 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 주 주말, 나는 쏜살같이 본가에 들러, 명함을 아빠에게 한가득 드렸다. 100장이 넘다 보니 몇 년은 쓸 것이었다. 아빠는 잘 쓰겠다며 기기조립을 하러 밖으로 룰루랄라 나가셨다.




한 달 뒤.

한동안 여러 일로 바빠 본가에 놀러 가지 못했다가, 오래간만에 짬이 생겨 본가에 놀러 갔다. 부모님은 잠시 장을 보러 가, 나 혼자 집을 정리하며 부모님을 기다렸다.

큰 방에 있는 아빠의 책상은 여러 부품들로 특히 어질러져있었는데, 책상을 정리하려던 찰나 끄트머리에 내 명함이 삐죽, 나온 게 보였다. 아빠에게 드렸던 내 명함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내가 준 명함이 그대로, 한 장도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용하기 불편하셨나,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부모님이 장을 보고 돌아오셨다. 나는 아빠에게 명함을 보여주며 물었다.


"아빠, 명함 안 쓰셨수? 쓰기 불편했나요?"

"어~? 아 그거? 쓰기 딱이지~"


아빠 말로는 사용하기도 편하고 본인이 원하던 종이라고 한다. 나는 더더욱 이해가 안 됐다.


"그러면 쓰시지 왜 안 쓰시오? 많이 쓰라고 100장 넘게 드렸는데..."

"ㅎㅎ"


오래간만에 아빠한테 도움이 될까 했는데, 막상 아무런 도움도 못 드린 것 같아 괜히 서운했다. 아빠는 우물쭈물 머뭇거리다, 멋쩍게 명함을 한 장 집으며 말씀하셨다.


"다른건아니고..."


그림25.png


"여기 우리 딸 이름이 적혀있어서..."


"......"


"쓰면 딱이긴 한데... 막상 기름 닦는데 쓰려고 하니... 아무래도 우리 딸 이름 위에 기름이 묻는 거니까..."


아빠가 명함을 정돈하며 계속 말했다.


"그래서 아빠가 우리 딸 명함은 책상 위에 두고 틈틈이 잘 보도록 할게요.ㅎㅎ 종이는 다른 거 찾아보면된다."


그렇게 아빠는 100장 가까이 되는 내 명함을 가지런히 정리해 책상위에 두었다. 정리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낡은 내 명함은, 내눈엔 그저 10 년 전에 사용했던 종이쪼가리 100장에 불과했지만 아빠 눈엔 딸의 이름이 적혀있어 먼지 하나조차 묻히기 미안한 종이 100장이었다.


종이 몇 장에, 나는 오늘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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