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세기는 손끝
계절이 바뀌다
눈을 뜨자 그녀는 또다시 처음의 그 장소에 서 있었다. 하지만 공기는 더 이상 익숙한 계절의 것이 아니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허파 깊숙한 곳까지 얼음 조각이 스며드는 듯한 서늘함이 밀려왔다.
봄의 기운은 사라지고 겨울의 차가움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정원에는 얇은 눈이 금이 가기 직전처럼 내려앉아 있었고 바람은 오래된 나무의 몸통을 긁으며 낮게 울었다. 그 소리는 마치 황폐한 왕궁 전체가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힘이 등을 떠미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스를 수 없는 힘에 발을 내디뎠다.
왕궁은 뒤엉킨 미로였지만 길이 자연스럽게 열려 그녀의 발걸음에는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도착한 곳은 왕의 침소 옆 은밀하게 격리된 작은 처소. 문 너머에서 왕과 어떤 존재의 실루엣이 포개져 있었다. 왕의 품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그 존재는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존재와 왕의 사랑
문틈 사이로 황금빛이 얇게 흘러나왔다. 고요했으나 뜨겁고 금지된 사랑의 잔향이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
그 안에서 왕은 얼음처럼 여리고 투명한 존재를 끌어안고 있었다. 둘의 그림자는 서로의 숨결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고 빛과 어둠은 서로를 껴안으며
하나의 생명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왕의 손끝이 존재의 등선을 따라 미끄러지자
여인의 몸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잔물결처럼 퍼졌다. 그 빛은 온기의 형태를 띠고 왕의 팔을 타고 올라 둘 사이에 은밀한 온도를 흩뿌렸다.
존재는 규칙 없는 숨을 한 번 떨며 토해냈다.
그 숨결이 왕의 목덜미에 닿자 얼음과 불이 맞닿는 듯한 미묘한 떨림이 일었다.
왕은 여인을 서두르지 않고 더 깊이 끌어안았다.
사랑에 잠식된 남자의 품으로.
그 존재의 몸이 빛을 흘리듯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너 없이 미래를 엿볼 수가 없구나.”
왕의 목소리는 낮고 부서질 듯 흔들렸다.
“왕조를 지키려면 네가 필요하다.”
존재는 반쯤 꺼져가는 빛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사랑과 소멸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왕은 그 눈을 보자 더 깊게 여인을 감싸 안았다.
꺼져가는 빛을 자신의 몸으로 붙들어두려는 듯.
둘의 숨결은 서두르지 않았지만 음악의 가장 낮은음처럼 서서히 깊어졌다. 온기와 냉기가 뒤섞이며 빛과 그림자가 공기 속에서 조용히 흩어졌다.
순간 그 존재의 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 떨림이 사랑의 의미인지 소멸의 전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왕은 절박하게 여인을 끌어안았다.
“사라지지 마…”
그의 음성은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존재는 아무 말 없이 슬픔을 머금은 빛으로 왕의 가슴 위에 손끝을 얹었다. 살아 있는 온기와 사라져 가는 빛이 그 순간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잠들자 존재의 빛은 은은히 꺼져가기 시작했다. 문은 바람도 없이 흔들렸고 존재는 밤의 연기처럼 조용히 침소를 빠져나갔다.
살결에는 여전히 왕의 체온이 남았고 몸에는 사랑의 잔광이 부서질 듯한 푸른 입자로 떠돌았다.
바람이 스치며 존재의 머리칼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사랑을 나눌수록 여인의 육체는 더 투명해지고 빛은 더 깊은 곳으로 흩어지는 운명.
존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연못 속으로 스러지는 존재
그녀는 숨을 삼키며 그 존재의 뒷모습을 따랐다.
침소 아래쪽 겨울의 정적이 내린 연못이 고요히 기다리고 있었다. 수면 위 얇은 얼음은 금이 가기 직전의 유리처럼 투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존재는 연못 앞에 서서 조용히 숨을 고르는 듯했다.
그 순간 몸에서 일렁이던 푸른빛이 한 번 크게 흔들리며 조용히 가라앉았다.
마치 사랑의 여운이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듯한 찰나.
발끝이 얼음에 닿자 깨지는 소리는 없었다.
오히려 존재의 몸이 허공에 스며드는 듯 천천히 수면 속으로 침잠했다.
몸의 선이 기울어질 때마다 빛이 얇게 풀어지며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 빛들은 사라지는 별의 조각처럼 은밀하게 반짝이다가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