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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남편에게 흘러간 불친절

가장 안전한 곳에서 가장 가혹해졌다.

by 이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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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느 날 아침,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때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내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떠 있었고, 아이를 노려봤다.
그리고 내 서재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훈육과 화냄의 차이는 후회를 했느냐 안 했느냐라고 한다.
나는 그 행동을 하는 순간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아이 얼굴에 떠오른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내 심장 박동 소리가 동시에 내 귀에 박혔다.
그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남편 이야기도 있다.
남편은 집안일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구석구석 닦고, 청소기를 두 번 돌리고, 놓친 먼지를 찾아내는 데 도가 텄다.
문제는 그 꼼꼼함이 내게 자주 압박으로 다가온다는 거였다.

남편이 한숨을 쉬거나 미간을 찌푸릴 때,
나는 그걸 곧장 비난으로 받아들였다.

“제발 집안일에 관심 좀 끄라고! 할 거면 싫은 내색 하지 말고 그냥 하든가!”
그 말이 어느 날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남편은 맞받아쳤다.

"나는 아주 작은 부분 좀 챙기라고 하는거야. 분리수거 할 때 하는 사람 생각해서 종이상자는 좀 펴줄 수 있잖아. 어휴!"


나는 그 자리에서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화살은 날아가 있었고, 내 화를 여전히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런 내 반응이 궁금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건지.
왜 나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이렇게 불친절할까.
왜 가장 안전한 관계 앞에서만 내 불안을 견디지 못할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적 안전지대 현상이라 설명한다.
사람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관계에서 억눌린 감정을 가장 쉽게 풀어낸다.
나는 아이와 남편을 안전지대라 믿었고, 그래서 가장 가혹하게 굴었다.


뇌과학적으로도 설명된다.
작은 자극이 들어올 때, 이성을 담당하는 전두엽보다
위험을 감지하는 편도체가 먼저 반응한다.
남편의 한숨, 아이의 칭얼거림이 내게는 위협으로 번역되었고,
나는 감정을 폭발시켰다.

그러고 나서야 전두엽이 뒤늦게 '너는 지금 후회할 거야'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내가 읽었던 책들이 내 질문에 답을 주었다.

브레네 브라운은 말했다.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다.”

나는 그 취약함을 가리지 못하고, 화와 불친절로 덮었다.

사실은 내 두려움이었다.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닐지도 몰라.”
“나는 좋은 아내가 아닐지도 몰라.”

그 불안이 결국 아이와 남편에게 향했다.


크리스틴 네프는 자기연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기비난은 결코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나를 향해 휘두르던 자기비난의 칼날은
결국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도 흘러갔다.

나를 미워하던 방식 그대로, 아이와 남편을 미워했다.


마셜 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는 아주 단순한 원칙을 알려준다.
상대를 비난하기 전에, 내가 느낀 감정을 먼저 말하는 것.

관찰-> 느낌-> 요구.


“당신이 한숨 쉴 때, 나는 내가 아내로서 부족하다고 느껴.
나는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어.”

이 문장을 나는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없다.
대신, “제발 관심 좀 끄라”고 외쳤다.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이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한때 나는 믿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드러운 성질머리는 평생 못 고친다.'

하지만 많은 심리학자와 연구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정함은 성격이 아니라, 연습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작은 말 한마디, 작은 시선의 변화로도 시작할 수 있다고.


그러니 오늘 내가 불친절했다 해도,
내일은 연습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후회할 것이고, 아마 또 날카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건 고칠 수 없는 성질머리가 아니라
연습으로 달라질 수 있는 성향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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