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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불친절했던 날들

흑역사.

by 이지애


나는 종종 거울 앞에 서서 내 뱃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살을 잘라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너무도 자주 했다.
“나는 분명 비만 유전자를 달고 태어난 게 맞아.”


조금만 방심하거나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대로 살로 돌아왔다.

특히 아이의 방학, 병원 투어, 그래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바이러스.

가정보육은 내게 매번 힘든 시련이었다.
아이의 개학과 함께 돌아오는 건 자유가 아니라,
늘 불어난 체중이었다.
체중계 바늘은 대개 5킬로그램쯤 위로 올라가 있었고,
그 무게만큼 나는 나 자신을 더 깊게 미워했다.


그 미움은 곧장 아이에게 향했다.

"엄마가 그만하라고 했지" 식의 협박과 성질을 냈다.


내 속은 늘 불친절함으로 가득했다.

아이의 울음이나 칭얼거림에 날카롭게 반응하던 나는

사실 나 자신에게 날마다 불친절한 언어를 퍼붓고 있었다.



폭식은 언제나 과자였다.
원래 나는 과자를 거의 먹지 않고 살았다.
과자 없는 삶이 당연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부터 과자는 집에 늘 있었다.
컬리 장바구니에 아이 것만 담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내 몫까지 장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한밤중, 아이를 재우고 불 꺼진 집에서 나는 조용히 부엌으로 갔다.
서랍에서 과자 봉지를 꺼내고, 뜯고, 한 움큼씩 집어 삼켰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입안에 퍼질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또 이러는 거야?'
'너는 의지가 약해.'

'이래서 넌 평생 안 변해.'

나는 손으로 과자를 밀어 넣으면서,
머리로는 내게 끝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먹으면서 동시에 나를 때렸다.
과자를 삼키는 속도보다 자기비난의 속도가 더 빨랐다.

그러곤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 세상 속으로 빠져들곤했다.


영화 <나이트비치> 속 대사가 생각난다.
“내가 창조한 것의 감옥에 갇혀 자신을 고문하는 것 같은 느낌이죠.”



정확히 그랬다.

다이어트라는 이름의 감옥을 만든 것도 나였고,

그 감옥 안에서 나를 채찍질하며 괴롭힌 사람도 나였다.


‘내일부터는 안 먹을 거야. 오늘은 힘들어서 그래.’
나는 늘 그렇게 합리화했다.
하지만 그것은 합리화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휘두른 폭력이었다.
내 몸을 달래는 척하면서
사실은 더 깊게 찌르는 칼날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흑역사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자기혐오의 역사였다.
체중계 숫자가 조금만 변해도

나는 거울 앞에서 복부를 움켜쥐며 말했다.
'이놈의 살 진짜 너무 싫다'

평소보다 많이 먹은 날엔 '한심한 인간' 이라며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었다.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언어로 나를 후려친 건 늘 나였다.

남이 그랬다면 평생 상처로 남았을 말들을
나는 매일같이 내 귀에 속삭였다.
스스로에게 가장 잔혹한 가해자가 나였다는 사실.


심리학에서는 이걸 자기비난 루프라고 부른다.
실패 → 자책 → 더 큰 불안 → 또 실패.
이 악순환은 감정적 진통제를 찾게 하고,
그 순간 뇌는 도파민으로 잠시 위로를 준다.
바삭한 소리, 혀끝의 짠맛이 바로 그 신호였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자기비난은
편도체를 다시 자극했고,
그 결과 폭식–자책–폭식의 고리는 더 단단해졌다.
내가 나에게 불친절했기 때문에,
이 고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불쑥 떠오른다.
그 시절, 한밤중 부엌 불빛 아래에서
과자를 쑤셔 넣으며 울던 내 모습이.
거울 앞에 서서 살을 잘라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 여자가
바로 나였다는 사실이.


나는 불친절한 아내이자 엄마였지만,
무엇보다도 불친절한 나의 가장 오래된 피해자는 나 자신이었다.

내가 날카롭게 찌른 수많은 말들이 아직도 내 귀 안에서 메아리친다.
그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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