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은 큰 결심이 아니라 지루한 반복에서 자란다
나는 변하고 싶었다.
HSP라는 기질을 알게 된 뒤, 이제는 구체적인 연습이 필요했다.
완벽한 변신이 아니라, 작은 시도들.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조금씩 흔적을 남기는 연습 말이다.
첫 번째는 멈추기였다.
아이에게 화가 치밀어 오를 때, 화장실로 들어가거나 소파에 앉았다.
'지금 말하면 안 된다'는 신호를 스스로에게 보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잠시 숨 고르기를 했을 뿐,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날 선 말은 방향만 달라졌을 뿐, 어김없이 아이에게 흘러갔다.
멈춤은 시간 벌기였지 아직 나에겐 해결책은 아니었다.
나는 20년 동안 거의 매일 운동을 했다.
수영, 헬스, 요가.
운동은 내 일상에 당연한 루틴이었고 그게 나를 지탱해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운동 후에도 집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버거웠다.
아이의 칭얼거림, 남편의 한숨은 운동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달리기를 해봤다.
러닝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사소해보이는 속도.
조깅이라고 하기엔 조금 빠른 걸음 정도.
요즘은 ‘슬로우 조깅’이라고도 부른다던데, 내겐 그저 지루한 40분이었다.
겨우 4km를 천천히 뛰었을 뿐인데 의외의 변화가 있었다.
오래해온 수영은 재미있다. 물속에서 리듬을 타고, 몰입의 즐거움이 있다.
조깅은 달랐다. 지루했고, 아무런 자극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지루함 덕분인지, 뛰고 나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잡생각이 줄고, 밤에 잠도 더 잘 왔다.
아이에게 화를 덜 내는 날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뇌과학적으로도 설명이 된다.
수영처럼 몰입을 주는 운동은 도파민을 순간적으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조깅 같은 반복적이고 지루한 유산소 운동은 세로토닌과 엔도르핀을 늘려 뇌를 안정시킨다.
지루함이 오히려 뇌의 과잉 반응을 잠재우고, 나를 진정시킨 것이다.
(이건 나의 경우다. 하지만 지루함이 주는 도파민을 느끼는 누군가가 분명 있다고 믿는다)
나는 오랫동안 새벽 기상을 고집했다.
'성공한 사람은 새벽을 지배한다'는 말에 홀려, 억지로 잠을 줄이며 하루를 시작한지 꽤 되었다.
(그 적극성으로 임신을 한 상태, 아이가 신생아인 상태에도 책을 두 권이나 출간했다.)
그런데 아이도 예민한 기질을 타고났다.
내 발자국 소리, 컵 내려놓는 소리에도 금세 눈을 떴다.
내 새벽 기상은 아이의 수면을 깨뜨렸고, 결국 모두가 피곤해졌다.
그래서 바꿨다.
아이와 같은 시간에 눕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기로.
무리한 새벽은 포기했다.
아이를 재운 뒤에는, 남편과 함께 드라마를 보거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빨리 자야 한다'는 강박에 대화도 거절하고,
불친절하게 말을 끊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
물론 그 시간에도 여전히 날카로움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하지만 확실히 줄어들었다.
잠을 지키고, 대화를 지키는 것이 곧 다정을 위한 바탕이 된다는 걸 알았다.
남편과 아이에게 화를 내기 전에,
무조건 공감의 말을 먼저 꺼내는 연습을 했다.
아직은 서툴고, 어색하다.
“너 또 왜 그래?” 대신 “오늘 힘들었지?”
“당신은 왜 그렇게 말해?” 대신 “그 말에 내가 조금 서운했어.”
또 하나의 원칙은 ‘사실만 말하기’.
“너 또 짜증내지?” 대신 “네 목소리가 커졌네.”
작은 차이지만, 대화는 훨씬 덜 날카로워졌다.
비폭력대화 책에서 본 문장처럼,
상대의 행동을 평가하지 않고 관찰만 하는 연습.
나는 그걸 서툴게 흉내 내는 중이다.
멈춤은 실패했고, 운동은 지루했고, 대화는 어색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나를 조금 다정하게 만들었다.
나는 완전히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아이에게 화를 내고, 남편에게 날 선 말을 뱉는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줄어듦이 나를 희망하게 한다.
다정은 거창한 결심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다정은 지루한 반복 속에서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