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한 번 있는 생일이 숱하게 지나온 어제와 오늘처럼 그저 그런 날이 된다. 별 감흥이 없다. 손꼽아 기다리지도 않고, 서프라이즈한 이벤트를 기대하지도 않으며, 누군가 챙겨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아마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리라.
결혼 전만 하더라도 유명한 맛집을 예약해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하며 선물을 받고 밥을 쏘고(?) 약간의 음주가무를 곁들이는 등의 연례행사를 치렀다. 한창 연애 중일 때는 또 어땠는가. 오글거리지만 로맨틱한 이벤트를 내심 기대하며 생일만은 여느 때와 달리 특별하게 보내길 바랐다. 물론 그 당시 남자친구(지금의 남편)는 내 생일도 다른 날로 잘못 알고 있었고, 정정을 해줬음에도 케이크를 빼먹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공대 남자였지만, 어쨌든 요는 ‘생일이 설렜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은 나의 것보다 딸아이의 생일을 외려 기다리고,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를 궁리하며 들뜨곤 한다.
내 생일을 앞 둔 몇 주 전부터 남편은 “어디 분위기 좋은 호텔 레스토랑이라도 예약할까?”라며 답지 않게 부산을 떨었다. 오히려 시큰둥한 건 내 쪽이었다. 외식이 부담스러운 시기라 선뜻 북적대는 핫플레이스에 다녀올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집에서 즐기는 내공도 늘어났으니 이번 생일은 우리의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소소하게 지내보기로 했다.
D-1.
마침 휴가 중인 남편이 딸을 데리고 나갔다. 키즈카페에 다녀올테니 걱정 말고 푹 쉬고 있으란다. 혼자만의 시간을 주는 게 최고의 선물이라는 걸 눈치껏 터득한 공대 남자를 보며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말이 괜한 게 아니구나 싶다.
중간중간 보내오는 아이 사진을 확인하며 남편 말마따나 좀 쉬면 좋으련만,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는 이 놈의 몸뚱이는 그새 일어나 집안 이곳저곳을 쓸고 닦는다. 키즈카페에 손님이 없어서 아이 혼자 전세 내어 놀고 있다는 문자에, 심심해 할 우리 딸과 그 집 사장님의 생계를 걱정하면서.
예상 시간보다 늦게 돌아온 아이의 양 손에는 스티커가 잔뜩 쥐어져 있다.
“웬 스티커야?”
“서점 들렀다가 사줬어.”
“서점은 왜?”
“그냥.”이라며 얼버무리는 남편. 뭔가 좀 수상하다.
“세연아, 내일 엄마 생일인데 선물 뭐 줄거야?”
아이 손을 씻기며 별 의미 없이 물었다.
“음.. 없는데..”
“왜? 엄마 생일인데?”
놀릴 요량으로 잔뜩 서운한 척을 해본다.
“기다려 봐. 내일 깜짝 놀랄거야!”라고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는 아이. 음, 이 쪽도 뭔가 수상하다.
저녁밥을 차리는데 아이가 뛰어오더니 엘사 손가방 안쪽을 슬쩍 보여주며 소리 낮춰 말한다.
“엄마, 아빠한테는 얘기하지 마~ 나 생일 카드 썼어. 이것 좀 봐.”
아하, 요 깜찍한 것들이 그래서 서점에 갔구먼! 둘이 비밀로 하기로 하고 축하 카드를 준비했나 보다. 이미 봇물은 터졌으니 ‘에라이, 못 참겠다.’ 싶었는지 아예 카드를 펼쳐서 보여주려고 하는 녀석을 얼른 막았다.
“응, 알았어. 그럼 넣어뒀다가 내일 진짜 엄마 생일이 되면 보여줘~”
“응!”
아이는 아빠와의 약속을 못 지킨 게 내심 마음에 걸렸는지 그날만 몇 번이고 내게 다시 와서 아빠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D-Day.
가까스로 눈을 떴다. 자의로 깼다기 보다는 새벽같이 일어난 아이의 야단스러운 소음에 별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엄마는 생일날에도 늦잠을 잘 수가 없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화장실로 향하는 나의 뒤통수에 딸의 한마디가 쩌렁하고 울린다.
“엄마! 생일 축하해!!!”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내가 낳은 딸이 내가 태어난 날을 그 누구보다 먼저 축하해 주는구나 싶어서. 게다가 내일 생일이라고 했더니 자고 일어나면 내일이 된다는 시간의 개념도 이해할 만큼 많이 컸구나 싶어서. 애를 키우다보니 남이 보면 별 것도 아닌 일로 엄마의 마음은 자꾸만 몽글몽글해진다. 갓 끓여낸 순두부 만큼이나.
아이가 어제 보여주려다 말았던 카드를 다시 가져왔다. 총 세 장이다. 진지하고 담백해 웃음이 나는 남편의 카드 한 장과, 아이가 하고싶다는 말을 남편이 받아 적은 카드 한 장, 그리고 그걸 보며 아이가 삐뚤빼뚤 서툴게 따라 쓴 카드 한 장. 공대 남자와 딸의 앙증맞은 합작품을 보며 나는 하릴없이 실실거렸다. 녀석이 아빠와 함께 주고 싶다며 도로 채어 가기 전까지는.
기다리던 아빠가 일어나자 딸은 처음인 양 다시 카드를 내밀었다. 나도 이전 일은 없었던 것처럼 새로 기뻐했다. 줬다 또 뺏을까봐 이번에는 받자마자 화장대 서랍 깊숙한 곳에 몰래 숨겼다. 그런데 씻고 나와보니 서랍은 열려있고 카드는 어느새 아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엄마~ 이따 촛불 켤 때 다시 줄게!”
식사를 하고나서 케이크 앞에 둘러 앉았다. 촛불을 켜고 다같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니 “엄마는 노래 하지 마. 우리가 다 불러줄게.”란다. 생일인 사람은 노래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노래가 끝난 후 으레 그렇듯 아이가 촛불을 끄겠지 싶었는데 엄마가 하기를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다. 촛불 부는 걸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다섯 살 꼬마임을 잘 알기에 함께 불자는 손짓을 하니 신 나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다. 이렇게 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을꼬.
“짜잔! 엄마 생일 축하해!!!”
거실 조명을 켜기가 무섭게 아이가 궁둥이 밑에서 온기로 따끈해진 카드 세 장을 꺼낸다. 아빠와 엄마가 초에 불을 붙이느라 분주한 틈을 타, 슬쩍 가져와서 깔고 앉아있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엄마를 놀라게 해주려고 그 작은 머리를 얼마나 굴렸을까. 하루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이의 아기자기한 이벤트에 나의 마음은 다시 순두부가 된다.
딸이 어릴 때는 남편과 둘이서만 기념하던 생일이었는데, 이제는 ‘할머니가 엄마를 낳아준 날’이라며 아이가 더 나서서 좋아하고 축하해 준다. 세 식구가 점점 완벽한 한 팀, 사랑스러운 한 편이 되어간다. 이들과 함께라면 집에서만 보내는 생일도 꽤나 근사할 수 있다.
P.S. 여보, 근데 생일 선물이라던 아이폰은 언제 오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