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낯선 것을 마주하는 용기

'베니스의 상인' 창극

by 베러윤

나는 익숙한게 좋다.

늘 가던 길, 늘 주차하는 자리, 늘 마시던 커피와 늘 앉는 자리에 앉아, 늘 하던 일을 반복하는 것.

나는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예측 가능한 하루는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 같으니까.


하지만 기획자라는 직업을 얻게 되고 나서는 그 익숙함이 때로는 나를 가두는 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은 익숙한 선에서만 맴돌고, 감각은 익숙함에 무뎌지고, 아이디어는 점점 좁은 범위에서만 떠돈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처음에는 그냥 흔한 말 같았는데, 이제는 실감 나는 문장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일부러 낯선 것들을 만나려고 한다. 낯선 곳을 가보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경험에 나를 던져보다. 이건 나에게 작은 훈련이자 기획자로서의 감각을 확장하는 연습이다.




얼마 전, 우연히 모임에서 알게 된 분이 '베니스의 상인' 창극 티켓을 주셨다. 사실 처음에는 망설였다.


'내가 과연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 '창극이 뭐지?, 판소리랑은 또 다른 건가?'

무엇보다 공연 내용이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점이 가장 의아했다. 서양 고전을 창극으로 재해석한다니, 도대체 어떤 무대일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러닝타임은 무려 3시간.

그 긴 시간을 내가 집중해서 볼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요즘 야근이 많은 나날들이라 피곤했다. 하지만 주신 티켓이 아깝기도 하고, 한번 경험이라도 해보자 하여 가기로 결정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잘 다녀왔다.


첫 배우의 등장부터 신이 났다. 신나는 장단 위에 실린 말맛, 장면마다 쉴 틈 없이 몰입되는 스토리, 무대 위 배우들의 호흡과 소리의 에너지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완전히 끌어당겼다.


창의 울림 속에서 서양의 스토리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창이 전하는 절절함, 그 안에 담긴 억눌림과 슬픔,기쁨은 기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느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같은 이야기인데 전혀 다른 감정이 나를 흔들었다.


3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극이 흘러가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익숙한 이야기를 낯선 형식으로 마주하는 경험. 그건 단순한 공연 관람이 아니라 내 사고의 틀을 흔들리는 자극이었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이렇게도 풀어낼 수 있구나!'


감탄과 동시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형식이 다르면 감정도 달라진다

기획자의 직업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이 경험은 또 하나의 리마인드였다.




공연이 끝난 뒤, 극장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낯선 것을 마주할 때마다 괜히 걱정하고, 익숙함 속에만 머물고 싶어했던 내 습관들에 대해서.


많이 노력한다고 하지만, 아직도 익숙한 것만 좋아하는 나였다. 하지만 익숙함 밖으로 반걸음 나아갔을 뿐인데, 내 안에 이렇게 큰 감동과 확장이 생길 줄은 몰랐다.


익숙함은 나를 편하게 해주지만, 낯섦음은 나를 성장하게 한다.


내가 몰랐던 감정의 결을 만지고, 익숙한 나를 조금 흠들어보는 것. 그게 어쩌면 기획자로 살아가는 내가 가끔 감각을 다시 깨우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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