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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Aug 29. 2020

그래도 어머니의 오늘은 항상 어제보다 낫다.

힘들어서 넘어져도 그 길 위에만 있으면

 방문용 가방을 꾸리면서 밖을 내다 보고 또 내다 본다. 이쪽 하늘은 시커멓고 저쪽 하늘은 파랗다. 오늘 방문 예정인 4가구가 모두 고령에 만성질환자이거나 치매가 있는 거동 불편자들이라 방문을 미룰 수는 없다. 특히나 진료소에서 제법 부락이라 특별한 요청이 없으면 기본으로 한 달에 두 번은 들여다보려고 계획한 가정들이다.


 가장 마지막 코스에 있는 H 어머니 집은 좁은 비탈길을 가파르게 오르면(매번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어떻게 피양해야 하나 걱정하며 서둘올라가는 길) 산 바로 아래에 있는  집.

혼자 사시는 75세 H 어머니 집에 도착할 즈음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아 서둘러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조급하다. 대문에서 '계세요~~?'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니 겨우 대답하며 나오시는 H님.

"잠들었나 봐"

"어머니 어디 편찮으세요?"

낮에 누워계시는 분이 아니니 깜짝 놀랐다. 겨울에도 집 밖에서 뭔가를 쉬지 않고 하시는 분이다. 갈 때마다 당신 키보다 더 큰 고추 밭 속에서 대답을 하시거나 뒤뜰 어디에선가 대답을 하시는 분이 낮잠이라니.

"아냐~ 읍내 안과에 갔다 왔더니 너무 힘들어서 잠깐 드러누웠다가 잠들었나 봐"

"깜짝 놀랐어요. 낮에 누워 계시는 거 처음 본 것 같아요"

"읍에 한 번 나갔다 오면 몸살이 나. 어서 들어와요."

부엌문으로 들어가 식탁에 자릴 잡고 앉았다. 머리가 닿을 것 같이 낮고 답답한 방보다는 부엌이 그나마 낫지만 흙바닥 겨우 면한 부엌도 좁고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무릎이 너무 아파서 버스 타러 가는 것도 몇 번을 앉아서 쉬었다가 가고 읍에 가서 터미널부터 병원까지 가는 것도 천리만리야"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시지 않고 그 다리로 걸어갔다 오셨어요? 으이그 어쩌려고..."

혈압계와 혈당기를 꺼내며 나무라는 진료소장을 보며 공연히 민망해하시는 어머니. 

"거리가 어중간하잖아? 택시비가 아까운 거리야. 그나저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클났어"

 애꿎은 긴 장마를 탓하며 부엌 가운데  버티고 선 기둥에 매달린 벽걸이(Goldstar) 선풍기를 켜신다.  때마다 내가 박물관이라고 놀리는 추억의 물건이 많은 집의 대표인 그 선풍기는 바람은 시원찮 소리만 요란하다.

"에이, 시끄러워"

어머니는 선풍기를 꺼버리고 냉장고에서 참외와 미니 수박을 꺼내신다.

"비가 너무 와서 죄다 엉망진창이야"

창칼로 껍질을 벗기는데 참외는 찌글찌글하고 수박은 떨어뜨린 것처럼 갈라져 있다. 벗겨서 숭덩숭덩 썰어놓은 참외도 그렇고 식탁 위에 쪼개 놓은 미니 수박도 맹탕이다.

"와, 시원하지만 싱겁다! 수박은 아예 무맛이네요"

늘 그렇듯 나는 입에 발린 소린 하지 않는다. 시골 어르신들은 맛있다고 하면 죄다 싸주시기 때문이다.ㅋ

"점심은 드셨어요?"

"읍에서 짜장면 사 먹었어."

"어머니 아버님들은 읍에 가면 맨날 짜장면인가 봐요~"

"짜장면이 제일 맛있잖아. 우리 영감도 생전을 그저 짜장면 아니면 국수만 잡쉈어. 아파서 15년을 앓았는데 한 끼는 무조건 국수를 달라고 해서 평생을 국수를 먹었어. 국수를 그렇게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땐 뭐 달리 먹을 거나 있었나....."

혈압을 재고 혈당을 재고 나서 수첩에 수치를 기록하며 맘이 무겁다.

"매 번 혈압도 살짝 높고 혈당도 살짝 높네요. 약은 잘 드시는 거죠?"

"약은 아침마다 꼬박꼬박 먹지. 짜장면 먹어 그런가? 당이 왜 세지? 근데 약이 이상하게 많이 남았어...."

어머니가 싱크 서랍에서 약을 꺼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약이 이렇게 많이 남았으면 안 되는데....."

"미안해. 잘 먹을게~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약부터 먹으면 안 잊어버리는데 요즘은 일어나면 그냥 밭에 나가서 일하다 들어온단 말이야. 낮에는 더워서 일을 못하니까. 그러다 보면 맨날 잊어버려. 낼부터는 잘 먹어야지"

해맑게 웃으신다. 홀몸 어르신인데 혼자 계시다가 큰일을 당할까 봐 상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한데 그 두려움은 나만의 몫일까. 두려움이 없으실까. 항상 의문이 들지만 나도 그 나이 되어 봐야 알 수 있을까.


 작년 처음 방문하던 날이 기억난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지면 홀몸어르신들을 특별 관리한다. 전화로 안부를 묻고 폭염 대비를 교육한다. 전화를 받지 않으시는 분들은 직접 방문을 한다. 당최 전화를 받지 않으시니 순간 가슴이 철렁해서 쫒아 갔었다. 오후 2시였는데, 마당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는 나를 맞으시는 H 어머니가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고 계셨다.

"이 폭염에 어쩌시려고 밭에서 일을 하세요? 그러다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거예요!!"

초면이었는데 하도 기가 막혀서 소리를 꽥 질렀었다.

"으응~괜찮아~모자 썼잖아~"

하면서 해맑게 밭에서 나오시며 하신 말씀이 지금 생각해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내가 키가 하도 작아서 고추밭에 들어가면 고추대가 키가 나오다 커서 그늘이 지니까 하나도 안 뜨거워요. 옛날에는 키 작다고 동네 애들이 놀렸는데 지금은 키 작은 것도 한 몫해"


 H 어머니는 항상 그런 식이다. 여태껏 바깥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면서 '옛날에는 문짝도 없는 잿간에서 볼일 봤는데 지금은 양반이지'하신다. 그러다가 무릎에 퇴행성 관절염이 심해져 재래식 화장실에서 쪼그려 앉아 볼 일을 볼 수 없게 되자 돌아가신 영감님 쓰시던 의자 변기를 방에 들여놓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겨울에 바깥에 안 나가도 돼서 좋다신다. 그 해맑은 웃음만 보면 그저 시골에서 평생 농사짓고 순탄하고 평범하게 사셨을 것 같지만, 살아온 이야기는 황정민 배우의 국제 시장 뺨친다. 이 자그마하고 너그러운 보살같이 생긴 어머니가 구덩이에 빠져 버둥대는 고라니를 맨손으로 잡아서 영감님을 위해 고아 드렸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한국 전쟁과 유신 정권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의 역사가 이 자그마한 어머니의 삶 안에 그대로 엮여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긍정적인 생각을 쑤셔 내어 펼쳐 보이시는 걸까.....

"우리 영감 이북에서 동란 때 혼자 넘어와서 날품 팔이 하는 걸 친정아버지가 나하고 동생 딸 둘이니까 아들이 없단 말이야. 이 땅을 물려주자니 아들이 없으니까 나를 우리 영감하고 결혼시켜서 나한테 이 땅을 물려주고 동생은 읍에서 장사하는 사람한테 시집보냈지. 동생은 장사를 했으니 늘 현찰이 돌아서 애들 힘들지 않게 키웠지. 그래도 내가 고생은 좀 더 했어도 우리 애들이 동생네 애들보다 더 잘 됐거든. 나는 항상 남들보다 내가 낫다~생각하고 살아왔어"

병약한 남편이 15년을 집에서 앓았고 결국은 거동이 어려운 상태에서 마루보다 낮은 부엌을 내려오는 한 칸 계단에서 낙상해 고관절 골절로 돌아가셨다. 내 생각엔 요양병원에 모셨으면 피차 더 나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으나 어머니는 영감님 포기 안 하고 요양병원이 아닌 집에서 본인이 직접 병시중 들고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했다고 자부심 아닌 자부심을 갖고 계신다. 삶의 무게를 저 작은 키로 어찌 지탱하고 살았을까, 싶지만 해맑은 미소가 모든 것을 대신 말해 준다.


 "애들이 집을 새로 짓자고 하는데 그냥 화장실 하나 들이고 거실이나 새로 들이자고 했어. 집 하나 짓는데 1억이 넘게 든다니 뭐하러 그 큰돈을 들여서 집을 지어. 나같이 쪼끄만  할머이 혼자 사는데 큰 집이 필요치 않잖아? 이담에 나 죽으면 지들 은퇴하고 내려올 때 그때나 짓든지 말든지"

그리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서 부정맥이 나타난다. 실은 '흉통'도 자주 있었다고 하신다. 진료소장이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그냥 대수롭지 않게 어느 병원 무슨 과로 가야 하느냐고 적어 달라 신다.

"나야 뭐 지금 죽어도 아쉬운 건 없지..."

당장 심장에 어떤 이상이 있는지 몰라 진료소장은 걱정이 가득한데, 이 어머니는 긴 장마에 고추가 죄다 병들어서 고추 딸 것이 없는 것이 더 큰 걱정이시다. 도시에서 공직에 있는 아들과 며느리가 걱정해서 일에 지장이 있을 것도 걱정이고 코로나 때문에 병원 간호사로 일하는 딸 손녀도 큰 걱정이다.


 누가 감사패나 표창장을 주는 것도 아닌데 미련하리만큼 자신의 몸과 안위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이 용감한 여전사들을 어쩌랴. 지난가을 김장 때 당신이 들어가서 누워도 될 정도로 커다란 '고무통'에 순무를 가득 썰어 담고  '나는 이가 아파서 깨물어 먹질 못해'도 당신 키 만한 주걱으로 마치 노를 젓듯 순무김치를 버무리던 천하장사. 마당에 꽃을 가득 심고 가뭄에 말라죽을까 봐 일 하다 말고 들어와 바가지로 물을 주는 고운 심성의 여인. 그런 어머니가 내게 하신 말씀을 나는 항상 잊지 못한다.

"나는 애들이 잘못된 길로 빠질까 봐 애들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아버지 욕도 안 하고 남들하고 다투지도 않았다"라고. 그리고 '힘들어서 넘어져도 비틀거려도 그 길에서만 벗어나지 않으면 언젠가는 내가 옳게 살았구나 하겠지'하고 생각하고 살아왔다고. 철학자가 따로 없다.

"나는 그래도 그런대로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게 잘 살았는데 애들한테 미안하지. 나 때문에 우리 애들도 고생을 많이 했어. 그걸 뒤를 대주지 못해서..... 그래도 다들 잘 됐으니 됐지 뭐...."

그렇게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으면서도 죄인이다. 그런 H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삶을 사셨으면 됐어요. 잘 사신 거예요'

늘 그렇다. 빨리 돌아가야지 생각하지만 더 지체되곤 한다. 너무 오래 지체해서 돌아오는 길에 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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