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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Jan 20. 2021

여학교 아닙니다.

그냥 여학생만 나옵니다.

 오늘 하얀 '양은' 냄비에 철철 넘치도록 살얼음 가득한 식혜를 가지고 오신 K어르신은 옆구리에 담이 결려 '이리도 못 눕고 저리도 못 눕는다'라고 호소하셨다. '365일 중에 325일을 잠시도 쉬지 않고 일만 하는 어머니가 어찌하여 병이 나셨을까?'하고 놀렸더니, K어르신의 자가 진단은 이러하다.

"내가 일 할 때는, 어서 저걸 빨리 다 해치워야지~하는 생각에 막 정신없이 하거든? 그럴 때는 아픈 것도 모르고 막 하는 거야. 겨울에는 또 경로당 나가서 하루 종일 놀고 교육도 받고 하니까 또 아픈 줄 모르고 움직이기도 하는 건데 이놈의 코리난지 뭔지 때문에 종일 집에만 들어앉아서 테레비만 보니까 더 아픈 것 같아."


 그도 그럴듯하다. 코로나 19 감염증 유행 이후로 경로당을 제대로 한 번 열어서 모여 본 적 없는 어르신들이다. 진료를 받으러 오시거나 개별 가정 방문을 하며 만나는 어르신들만 놓고 보아도 추위와 코로나로 외출을 거의 안 하시고 집에서 TV 보는 일로 매일을 소일하니 '코로나 블루'가 아니더라도 인지능력이 눈에 게 떨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심히 걱정이다.

"근데 나도 나지만 우리 할아버이는 더 큰 걱정이야."

"왜요?"

"저렇게 땔감 한다고 온 산으로 나무만 하러 다니는데 어제는 도깨비가 홀렸는지 어딜 헤매다가 옷이 죄다 흙투성이가 돼서 캄캄할 때 들어왔다니까...."

"운동도 하시고 좋긴 한데 혹시 산에서 길 잃어버리시면 겨울에 큰일 나죠. 혼자 나가시면 안 되겠어요. 그리고 제가 내일 오후에 집으로 가서 아버님 치매검사 좀 해드릴게요."

"그 할아버이 고집을 누가 말려. 나가지 말래도 그럼 불 안 때고 겨울 날 수 있나? 하면서 역정만 내지. 그깟 할아버이 나가서 얼어 죽든지 말든지. 나야말로 겨울에는 경로당에 나가 있으면 교육도 하고 운동도 시켜주고 해서 좋았는데 이놈의 코리나 어서 끝나야지 원..."

"그러게요... 어머니도 사람 모인데 가지 마시고 마스크 꼭 하시고 손 잘 씻으셔야 해요. 코로나에 걸리면 코로나 끝나는 것도 못 볼 수 있으니까"

코로나 예방 수칙으로 진료를 마무리했다. 요즘 거의 모든 대화의 시작은 코로나 안부요 마무리는 코로나 원망이다.  정말로 코로나 19가 더 길게 가면 또 다른 사회적 부작용이 어디에서 나올는지 몰라 걱정이다.    


 "소장님, 그 할아버지 인지장애 있으신 건 아닐까요?"

5월에 새로 임용 예정인 신규 보건진료소장 실습을 나온 A선생이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걱정 없을 정도로 경력이 많고 젊고 똑똑하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보건사업 운영에 대한 업무는 배워 볼 기회가 거의 없어 딱하다.

"코로나 전에 경로당 나가면 30~40명씩 모이는데 죄다 할머니들인 가운데 유일하게 청일점이 그 할아버지랍니다. 말도 안 하고 뭘 하라고 해도 전혀 안 하시면서도 100퍼센트 출석이셨는데"

돌이켜 보니 웃음이 난다. 그런저런 경로당 사연을 체험하지 못하는 A선생에게 경로당 건강증진 사업과 관련하여 문서와 말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쉬워 내친김에 지난 시간 내가 했던 이런저런 사업들을 기록한 사진들을 찾아 보여 주었다.


 마치 유랑극단 오프닝처럼 영양 교육을 시작하기 전에 손가락 스트레칭을 하며 바람잡이처럼 '어머니 수명 오 년 연장~ 십 년 연장~'하면 깔깔대면서도 얼마나 진지하게 잘 따라 하시던지.... 사진을 함께 보며 추억이 새록새록 돋는다. 지금은 마치 과거의 영화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듯 사진만 하나씩 넘기고 있지만 코로나 19로 온 세상이 정지되기 전엔, 음력 정월이 지나면 시작되는 농사 준비에 바빠지기 전까지 마을 경로당을 열 번은 더 나갔을 것이다. 겨울이 되면 마을 경로당에 모이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건강 교실 운영이 한창이어야 할 이때, 원래 하던 건강증진과 방문사업 업무보다 코로나 19 선별 진료소에서 검채를 하거나 환자를 후송하거나 요양시설에 대한 검채와 방역 점검을 하러 다니느라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다.


 "정말로 거의 다 할머니들 뿐이네요. 할아버지들은 다 어디 가셨어요?"

사진을 보던 A선생이 신기한 걸 확인하듯 웃는다. 사진마다 인원이 많건 적건 죄다 할머니들이 가득이다. 어떤 경로당은 할아버지라곤 경로당 열쇠를 가지고 계신 노인회장님 딱 한 분 나오신다. 할아버지들은 다 어디 가셨을까? 일단 할아버지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 독거노인 열 명 중 여덟, 아홉은 할머니들이다. 부부가 해로를 하는 중이어도 할아버지들은 경로당에 잘 안 나오신다. 할아버지들은 집에서 혼자 TV를 보거나 친구들을 만나 약주 한 잔 기울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모여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는 별로 취미가 없으시다. 귀찮아하신다. 반면에 할머니들은 집에 있으면 갑갑하다신다.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시고 여럿이 모여 웃고 떠들고 먹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신다. 그러니 경로당에서 건강 교육한다고 미리 마을 방송을 하면 할아버지들은 건강 검사만 달랑 받으시고 도망을 가신다.  '교육도 받고 가세요. 재밌어요~ 홍보물로 나온 것도 드려요.' 하면 '어서 할머니들 받으시라고 해요. 나는 면에 좀 가봐야 해서'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신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알고 있다. 연세가 80세가 넘으신 어르신들은 사실 면에 갈 일이 그다지 없으시다는 것을. 그저 옛날부터 면에 간다고 하면 중요한 업무가 있는,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던 사고방식이 여전하신 것뿐이다.  그렇게 할아버지들은 '중요한 비즈니스 때문에 면에 다들 가시고' 교육과 운동과 놀이의 수강생은 죄다 여학생들 뿐이다. 혹시 할아버지가 한두 분 끼어 계셔도 TV를 틀어 보시면서 외면하시니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일이 많다. 교육을 하는 내 입장에서도 할머니들을 모시고 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하찮은 유머에도 여고생들처럼 박장대소하신다. 뭘 시켜도 빼는 법이 없다. 노래도 춤도 시키면 다 하신다. 덕분에 오히려 내가 에너지를 더 받고 나온다.


 여학교는 아니지만 학생의 90퍼센트 이상이 여학교인 경로당 건강학교가 그립다. 바쁜 일정에 때로는 어떻게 한 번 안 하고 넘어갈까? 유혹에 빠지기도 했지만 '소장님 나오는 날'을 목 길게 빼고 기다리시는 어머니들 생각에 가방을 꾸리고 홍보물을 담아 가지고 장돌뱅이처럼 경로당마다 돌아다니던 날이 그립다. 겨울 추운 날 소장님 나오는 날이라고 떡도 찌고 계란도 삶고 고구마도 찌던 그 날들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차를 타고 지나던 큰 길가 경로당 앞에 올망졸망 마스크를 끼고 앉아 햇빛을 쬐는 할머니 두어 명이 눈에 들어오면 가슴이 짠하다. 이 막연하고도 끝이 안 보이는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이어가는 저 어르신들이 다시 모여 깔깔 대고 손뼉 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건강교실에 둘러앉는 날이 어서 와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다리 운동 한 번이라도 더 시켜 드려야 한다. 벌써 올 겨울에만 독거 어르신 두 분이 낙상으로 골절상을 당하셨다. 꼬부랑 할머니가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하는 내 집 안마당을 쓸다가 넘어지셨다. 혼자만 마음이 조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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